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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효성 국제PEN한국본부 인천지역부회장
그 할아버지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28번 걸었다. 할아버지는 순례자들에게 말했다. "인생은 선물이다. 그렇고 그런 선물이 아닌 아름다운 선물이다"라고. 길 위에서 만난 순례자들에게 삶의 소중함을 전도한 할아버지는 암으로 아내를 잃었고 자신도 암 환자였다. TV 예능프로그램 ‘스페인 하숙’을 보다가 어느 순례자가 전해준 이야기에 숙연해졌다. 보통 프랑스 생장에서 출발해 피렌체산맥을 넘어 스페인 서쪽 산티아고 데 콤보스텔라를 도착점으로 800㎞쯤을 걷는 순례길은 가슴을 할퀴는 아픔도, 죽이고 싶을 만큼의 미움도, 터질 것 같은 분노도, 세상에 지친 마음을 내려놓게 되는 길이다. 30일에서 40일 정도가 걸리는 순례길은 나와 너와 세상이 서로가 위로 받고 서로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간을 만들어간다고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예수의 12제자였던 성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된 산티아고 데 콤보스텔라를 찾아가는 기독교의 성지순례길로 시작됐다. 지금은 순수한 종교적 순례자가 25%인 반면에 문화와 종교적 이유를 결합한 순례자 비율이 66%이고 문화체험을 위해 걷는 사람의 비율도 9%라는 스페인 정부의 통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 세계 여행자들이 찾는 힐링 여행지가 됐다. 스페인까지 갈 것도 없이 제주도 올레길을 찾는 사람들도 많다. 제주올레길을 만들 때 돈 내고 힘들게 걸으려고 오는 사람들이 있을까 걱정했다는 후일담을 들은 적이 있다. 여행은 눈 호강 입 호강하면서 잘 대접받는 것이라 생각했던 시절이라 걷기 여행에 호응해 줄까? 염려했다는 말에 수긍이 갔다. 제주도 올레길은 전매특허까지 받아서 어느 곳에도 올레길이란 명칭을 쓸 수 없을 만큼 독보적 인기를 끌었고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지역의 특성을 살린 둘레길 조성으로 걷기 좋게 꾸민 길들이 전국 곳곳에 있다.

 걷기운동은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신체활동이라고 의사들이 권장한다. 운동 부족을 채워줄 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전문가의 조언이 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운동화 끈 조여 매고 나서는 일이 몸에 익지 않아 뭉그적거리다가 내일부터, 주말에는, 자꾸 다음으로 미루게 된다. 봄비 내려 촉촉한 날, 생각 많아 무거운 머리를 비워내 보려고 공원길을 걸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공원길에는 연두색의 싱그러운 잎사귀들이 상쾌했고 피어난 봄꽃의 환한 환영도 기분이 좋았다. 공원길을 몇바퀴 돌면서 꽤 많이 걸었다. 바글바글 복잡한 머리가 비워지는 것 같았다. 1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고민이 생기거나 몸이 가라앉거나 하면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서본다. 걷기 중독까지는 아니어도 예전엔 시도조차 안 해 본 걷기의 매력에 빠져 든다. 우울감으로 힘들어하면 여러 가지 방법의 처방을 내려주곤 했던 지인들에게 요즈음은 내가 걷기를 권한다. 열정 많은 우리 국민은 무엇을 해도 확 끓어올라 화끈하게 몰린다. 유독 경쟁 치열한 우리 사회는 상대적 박탈감에 무기력하다가 분노하다가 마음을 다쳐 지치게 된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외국인 중에서 한국인 비율이 월등해서 비교가 안될 정도로 한국인이 많다는 스페인 정부의 통계도 있다. 그만큼 한국인은 순례길을 걸어야 할 이유가 절박한 사람이 많고, 핫한 트렌드에서 뒤처지면 주도그룹에 속하지 못한다는 강박 심리도 있는 것 같다.

한국인이 많이 찾다 보니 알베르게에 묵었던 외국인들이 한국 사람들의 무개념을 비판하는 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한다. 알베르게에 묵는 순례자들은 식사를 간단히 만들어 먹는 경우가 많은데 여럿이 뭉쳐서 온 한국인들이 조리대를 독점해 장시간 닭을 삶고 술판을 벌여 민폐가 된다는 제보다. 순례길을 혼자 걸어야 한다는 규칙은 없지만 신앙심으로 왔든, 자연경관을 즐기러왔든,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나려고 왔든, 마음을 내려놓으려고 왔든, 같은 땅을 밟으며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하고 흘러가며 비어내는, 상처를 다독이며 타인에 대한 배려를 경험하는 순례길의 의미를 새겨봐야 제대로 된 힐링 길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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