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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호림 칼럼니스트
고전이 가치를 갖는 것은 그 속에 녹아있는 세상의 이치와 인간관계의 지혜가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양의 삶의 지혜가 압축된 고사성어도 그러하다. 앞선 세대의 삶의 경험들이 반면교사로 혹은 타산지석의 거울이 될 수 있고, 길을 잃은 ‘환상의 나라’에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고사성어를 통해 이 나라가 처한 몇몇 문제점을 살펴보겠다.

 먼저 춘추전국시대 한비자에 나오는 정(鄭)나라 어떤 사람의 신발 사는 이야기인 정인매리(鄭人買履)의 고사는 이 정권에서도 유효하다. 그는 신발을 사려고 자기의 발 치수를 재어 뒀으나, 이를 잊은 채 시장에 갔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와 그 치수를 찾아 시장으로 갔으나, 이미 시장은 파시가 돼 신발을 사지 못했다. 이를 옆에서 본 사람들이 왜 직접 신어보면 될 텐데 신어보지 않았냐고 묻자, 발 치수를 잰 것은 믿을 수 있지만 자기 발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는 곧 이 정부 초기부터 추진한 소득주도 성장·고용·탈원전 등의 경제와 에너지 정책을 보는 듯하다. 집권층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이념’이라는 치수를 전제로 해 경제와 시장의 작동원리와 무관하게, 검증되지 않은 사회주의 경제정책을 일관되게 실험하고 있다. 그 결과 올 1분기 실질국내총생산은 미국(3.2%)과 중국(6.4%)의 높은 성장률과는 달리, 전기대비 0.3% 감소, 설비투자는 10% 감소, 수출은 2.6% 감소라는 유례가 없는 나쁜 경제성적표를 정부가 보여줬다.

 그러나 대통령은 우리 경제의 기초체력이 튼튼하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그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다. 왜 이 정권은 경제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성장 정책보다 이념을 우선하는 분배 정책에 매몰됐을까? 그들은 현실보다는 현실의 ‘이데아’인 ‘이념’을 더 신뢰하는 것으로 보인다. 불교 경전에는 군맹무상(群盲撫象)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시각장애자 여럿이 코끼리를 만진다는 뜻으로, 모든 사물을 자기의 좁은 소견과 주관으로 그릇되게 판단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결국, 인간은 자기가 경험한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진리로 여기는 오류를 범하며, 집권층의 정책 입안자들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특히 좌파정권에서의 경제정책은 그들에게 익숙한 사회주의 모델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란 실패한 사상이지만 영원히 죽지 않는다’라는 최근 해외 신간의 내용과 같이, 사회주의는 오늘날에도 인기가 있고 특히 젊은 층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현상은 젊은이들이 세상 경험이 없이 단지 이론의 세계에 머물러 있기를 즐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회주의란 놀랍게도 지난 100여 년 동안 현실 세계에서의 사회주의 건설 실패 경험에도 불구하고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실제로 소련과 중국에서 베네수엘라에 이르기까지 20여 국가에서 사회주의 사회 건설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지지자들은 이러한 시도가 ‘진정한 사회주의’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진정한 사회주의’를 실현하려는 명분을 가진 세력들은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집권자가 선언한 바와 같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상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주말의 광화문광장에서 볼 수 있는 좌우의 이념 대립에서부터 여야, 지역, 노사, 북핵갈등의 운전자론 등 정치·외교·안보·사회·경제·문화·역사·사법기관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는 모든 영역에서 돌아가야 할 길을 잃어버린 환상의 나라가 됐다.

이러한 현상은 마치 생각 없는 어린아이들이 모여 정신없이 놀다가 한 아이가 물이 가득한 커다란 독에 빠지자, 놀란 아이들이 제각기 도망가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를 본 어린 송나라의 사마광이 돌을 취해 독을 깨뜨리니 아이가 나올 수 있었다는 취석파옹(取石破甕)이라는 고사가 자치통감에 나온다. 이 고사는 임기응변의 기지로 고정관념의 틀을 파괴해야 난국을 빠져나올 수 있다는 의미로 흔히 인용된다. 이러한 지혜는 총체적인 난국에 빠져있는 환상의 나라에 요구되는 지도자의 덕목이자 리더십이다.

 그러하려면 자신의 고집을 버리고 남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사기종인(舍己從人)의 넉넉한 마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최근 공수처법안과 연동형 비례대표제 입법안이 국회에서 제1야당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패스트트랙 상정으로 물거품이 됐다. 과연 이 나라는 스스로 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춘추전국시대 관중이 원정에서 돌아오다가 산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늙은 말을 앞세워 길 안내를 받은 노마지지(老馬之智)의 고사가 생각난다. 계절의 여왕인 5월이 왔어도, 민초들에겐 봄이 오지 않은 듯한 그런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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