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0301010001165.jpg
트로이전쟁에 참여한 아가멤논 장군은 여신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자신의 장녀를 산 제물로 바친다. 비극의 한가운데 서 있는 아버지 아가멤논도, 죄 없이 끌려가는 딸 이피게네이아에게도 선택권이 없었다. 이들은 여신 아르테미스의 요청을 따라야만 했다. 무력감은 자신의 삶이 타인에 의해 결정되고 통제될 때 극대화된다. 장기판의 말처럼 끌려다니는 인생은 희망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과 같다. 영화 ‘유전’은 가족을 지배하는 유전자의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다. 부모와 자식을 선택할 수 없듯 출산을 통해 전해지는 유전자 또한 막을 길이 없다. 피할 수도, 외면할 수도, 선택할 수도 없는 불가항력의 비극을 만나 보자.

 영화는 애니의 작업실에서 시작된다. 미니어처 예술가인 애니는 자신의 집을 소재로 한 전시회를 앞두고 있다. 카메라는 모형 공간 중 큰아들 피터의 방을 보여 준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의 방은 이내 실제 사람이 움직이는 공간으로 대체된다. 이 의미심장한 오프닝은 영화의 전체적인 맥락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애니의 가족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들은 사실 인형처럼 정해진 삶을 살아갈 뿐이다. 아래로 대물림되는 피의 유전은 예정된 3대의 비극을 향해 나아간다.

 애니는 어머니 엘렌을 비밀스러운 사람으로 기억한다. 속을 알 수 없던 어머니의 장례식은 생각보다 슬프지 않았다. 하지만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갈 줄 알았던 기대와는 달리 애니의 집안에는 무거운 기운이 감돈다. 그 뿐만 아니라 불의의 사고로 둘째 딸 찰리를 잃고, 아들 피터마저 이상해진다. 미치기 직전인 애니는 귀신이라도 좋으니 다시 딸을 만나고 싶어 하는데, 그 염원은 뜻밖에도 이뤄진다. 애니는 죽은 딸 찰리의 영혼을 느끼는 영매가 된다. 그런데 이 모든 사건은 망자인 어머니 엘렌의 치밀한 계획이었음이 드러난다. 비정상적인 가족사를 둘러싼 비극의 실체는 이 가족에게 세습되는 ‘악마 맹신’의 유전자에 기인했다.

 2018년 개봉한 영화 ‘유전’은 여름 시즌용 공포영화처럼 보이지만 고전 호러와는 여러모로 다르다. 우선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떠들썩한 무서움이 없다. 관객들이 무서운 영화를 보면서도 즐거울 수 있는 까닭은 온갖 종류의 사건들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으며, 자신은 객석에 앉아 관찰만 할 뿐 어떠한 해도 입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유전’은 관객마저도 안전하지 않은 출구 없는 공포를 전하고 있다.

 집안에 흐르는 이상한 피, 괴상한 기운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영화에서 공포의 주범은 악령만이 아니다. 이를 맹신하는 내력을 후손에게 전하는, 생명의 근원인 어머니와 모계 유전자가 공포의 주범이다. 결국 대물림이 비극의 원인이라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피해자는 선택권 없이 비극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공포영화가 세상을 반영한다는 측면에서 봤을 때 혼란스러운 오늘이 선택과 희망의 가능성조차 파괴한 상상력의 기반인지도 모르겠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