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천의 번영과 쇠락을 온몸으로 부딪힌 이가 있다. 동인천에서 성신카메라(카메라 점포 겸 사진관)를 운영하는 이준석(74)사장이다. 촬영할 인물의 성격과 이미지를 꿰뚫던 그의 눈은 백내장이 진행 중이다. 매끄럽게 빠졌던 청년의 손마디는 삶의 풍파를 겪은 70대 남성의 굳은살로 울퉁불퉁해졌다. 오랜 세월 동안 손톱도 꽤나 고생했나 보다. 이 사장은 핏기 없는 회색빛의 두꺼운 손톱으로 덮인 손가락을 굽혀 오늘도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누르고 있었다. 많은 사연이 담긴 듯한 그의 신체 일부들은 지금의 동인천과 닮아 있었다.

▲ 이준석 성신카메라 사장이 지난 1일 인천시 중구 인현동의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은 카메라 렌즈에 투영된 이 사장의 모습.
# 벽안(碧眼)의 신부에게 사진을 배우다

 1945년 황해도 신천. 지금은 남녘 땅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한 노인이 북녘 땅에서 우렁찬 울음을 내뱉으며 태어났다. 이준석 사장이 태어난 그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세계사의 전환점이 됐다. 그로부터 5년 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이 사장의 가족은 포탄과 총성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렇게 삶의 터전으로 생각한 곳이 충청도 서천의 비인이었다.

 그는 앞집에 세를 살던 프랑스 천주교 신부가 사진을 찍는 모습이 신기했다. 이내 푸른 눈의 신부에게 사진을 배웠다. 그렇게 그의 카메라 인생이 시작됐다.

 1968년 인천. 중앙시장의 한 카메라 취급 점포에 취직한 그는 카메라 중개업을 시작했다. 장사 수완이 좋았던 이 사장은 당시 5년 동안 번 돈으로 동인천역 인근에 카메라 점포를, 배다리 인근에 스튜디오를 차렸다.


 "1968년 9월 10일 동인천 성신카메라 숍에 취직했어요. 일본말로 ‘나까마’라고 했는데, 당시 미군 부대에서 패트리(Petri)라는 카메라가 많이 중고로 나왔단 말이야. 중앙시장 카메라 나온 것을 청계천에 가지고 다니며 판매했죠. 1대 팔면 3천 원이 남아요. 하루에 보통 3대 정도 판매하는데 한 달이면 30만 원이고 일 년이면 300만 원이 넘죠? 그 당시 수도국산 달동네 집 한 채가 150만 원이고, 시청 과장급이 8만 원, 짜장면이 150원 할 때예요. 친구들 중에 결혼도 가장 먼저 했지. 집도 먼저 사고. 그로부터 나중 일이지만 자가용이라는 개념이 잘 없을 때 차도 가장 먼저 샀어요. 맵시나라고 대우자동차에서 나왔던…. 뭐 금전적으로는 풍족했죠."

# 성실하게 일하고 끊임없이 연구하다

 지금으로 치면 그는 억대 연봉자였다. 타고난 장사 수완만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성실하게 일하고 끊임없이 연구하는 자세가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

 그는 직접 제물포고등학교나 대건고등학교로 출장 가서 사진동아리 지도를 맡았다. 게다가 카메라 수리에도 능했고, 사진 인화약품을 연구해 직접 조제까지 시작했다. 카메라와 관련된 모든 일을 다룬 그였다. 지금으로 치면 ‘원스톱 서비스(One stop service)’다. 이러한 편리함에 그의 가게는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인터뷰 중에 어린 딸아이의 손을 붙잡고 가게로 들어온 손님이 있었다. 가게 인근 인일여자고등학교 졸업생 최은주(40)씨다. 여름휴가를 계획 중인 최 씨는 아이의 여권사진 때문에 성신카메라를 찾았다.

 "이 근처에서 추억이 많죠. 동구에서 태어나 이 근방에서 초·중·고를 나왔는데 제가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엄청나게 번화한 거리였어요. 학기 초에 사진 가져오라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때부터 사진을 잘 찍어 주셨고, 추억여행도 할 겸 사진이 필요할 때는 성신카메라에 옵니다. 처음에는 몰랐어요. 그때 그 사장님이신지. 자리를 옮기셨다고 들었거든요. 몇몇 사진관을 돌아다니다가 사장님 얼굴을 보고 딱 알았죠. 그때 그 사장님이구나. 아직까지 일을 하시고 계셔서 든든해요."

▲ 인천시 중구 인현동에 위치한 성신카메라 전경.
# 고객이 만족하는 사진을 찍으며 시대의 변화를 보다

 사진가로서 그의 장점은 ‘인물을 보는 눈’이다. 성신카메라는 일종의 선거 성지(城地)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서는 두 명의 구의원 후보자가 이곳에서 프로필 사진을 찍어 당선됐다. 학생들도 마찬가지. 학생회장 선거 사진을 찍기 위해 몰린다.

 "우리 가게에서 사진 찍어 선거에 나가면 당선된다는 소문이 퍼졌나 봐요. 꽤 먼 곳에서도 와요. 부평에서도 오고, 박촌에서도 오고. 나도 신기해서 어떤 이유가 있을까 생각해 봤어요. 나는 프레임에 담으면 그분에게 어떤 끼가 있는지 보이거든요. 또 인상에 맞게 이미지를 만들어 주죠. 여러 표정과 제스처도 요구하고."

 과거 사진관의 주 수입원은 가족사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젠 가족의 붕괴나 핵가족화, 나아가 1인가구의 증가가 사회적 이슈가 되는 상황이다. 그 사회상의 변화를 이 사장은 몸소 느꼈다.

 "가장 큰 수입은 가족사진이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왜냐면 대가족이 없어요. 1960년대에 가족사진을 찍으면 기본이 9명이었거든요. 점점 줄더니 요즘은 처남·매부 다 합쳐야 겨우 6명이죠. 거기에 두 집의 강아지를 합해야 8명이고. 가족사진 찍겠다고 예약하면서 강아지도 함께 찍을 수 있느냐고 묻는 게 이제 다반사죠. 사진관 일을 하면서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시대와 사회의 변화를 직접 들여다볼 수 있어요. 참 신기하죠."

▲ 이준석 사장이 스튜디오에서 자신이 찍은 옛 인천풍경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인생의 마지막 여정도 카메라와 함께 하다

 "50년간 카메라 일을 했어요. 인생의 전부죠. 피란민 가족이라서 친척이 없고 나 혼자니까. 혼자 집안을 일군다는 게 무척 힘들었어요. 또 하나 어려웠던 것은 정신적으로 기댈 곳이 없었던 거예요. 정신적인 지주가 없었어요. 상의할 곳도, 도움 청할 곳도 없이 오롯이 혼자 해결한다는 정신력 하나로 여기까지 온 겁니다. 눈만 허락된다면 오시는 손님들 초심 잃지 않고 잘 모실 거예요.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365일 쉬는 날 없이 일할 겁니다. 우리 가게에 실버세대들이 많이 오셔요. 함께 나이 들어 가는 마음이 서로 짠하면서도 대견합니다."

 그의 오른쪽 눈은 백내장이 진행 중이다. 진료를 본 의사의 말로는 같은 나이 사람과 비교했을 때 100배 이상의 사용도와 피로도가 있다고 한다. 매일 카메라를 들여다보는 그의 눈이 상할 대로 상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지막 여정은 카메라 프레임 안에 담겨 있다.

 1968년 동인천역 광장에 20개의 공중전화가 놓인 시절, 꿈 많고 열정 가득했던 한 청년은 그 번영한 길거리에서 중고 카메라 장사를 시작해 인생의 여정을 시작했다. 프레임에 담겼던 수많은 시민들과 그 개개인의 인생을 머릿속에 그려 본 이 사장은 후회 없는 하루하루를 오늘도 살고 있다.

  장원석 기자 stone@kihoilbo.co.kr

사진=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정보=인천도시역사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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