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충청도 출신 故 김인배 씨(1924년생)는 아내와 두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인천으로 올라와 종이 장사를 시작했다. 평소 붓글씨와 한지 등 종이에 관심이 많았던 탓에 자연스럽게 지물포(紙物鋪) 일을 하게 됐다. 그 무렵 타향살이를 하면서 지게일도 하고 목수일도 해 본 그였지만 종이에 대한 애정이 가장 컸다. 김 씨가 같은 해 인천시 동구 금창동 일원에 ‘한양지업사(紙業社)’를 차린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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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시 동구 송림동의 한양지업사 김종성 사장과 건물 내부.
 지업사는 종이를 생산하거나 종이 가공품을 판매하는 조선시대 지전(紙廛)의 후신이었다. 그렇다고 김 씨가 직접 종이를 제작하지는 않았다. 그의 가게는 주로 한지로 유명한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생산된 한지를 떼다 팔았다. 당시 한지는 ‘전주지’라고 불릴 정도로 전주 제품을 으뜸으로 쳐줬다.

 사람이 많이 오가고 번창한 길목을 찾던 김 씨는 한양지업사 터를 배다리(삼거리)로 택했다. 배다리는 1883년 인천항이 외세에 의해 개항된 뒤 외지인들에게 쫓겨난 조선인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전쟁의 포화를 피해 인천으로 모여든 실향민들이 수도국산 아래 송림동과 송현동, 금곡동과 창영동 일대에 터를 잡고 무허가 판자촌을 형성했다. 동시에 이 일대는 개항 이후 번창한 포구문화와 인천에 주둔하기 시작한 미군부대(미국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아 ‘개항장∼신포동∼배다리’로 이어지는 지역 문화와 상권의 중심지로 급성장했다.


 배다리는 또 헌책방 골목으로도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한양지업사의 1대 사장인 김 씨의 가게가 어려운 시절에도 이전하거나 문을 닫지 않고 배다리 삼거리에 튼튼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 가게 일에 빠질 수 없는 대나무 자.
 특히 달동네 판잣집들은 지금의 아파트나 단독주택들과는 달리 수시로 세입자가 바뀌고 이사가 잦아서 장판과 벽지의 수요가 넘쳐났다. 김 씨의 아들 김종성 씨가 손이 모자라는 아버지를 대신해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한양지업사 일에 꾸준히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이다.

 2대 사장인 김종성 씨(1950년 생)는 가게 인근의 송림초등학교와 인천중, 제물포고를 나왔고 건국대를 졸업한 수재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받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남들보다 일찍 가게 문을 열고 남들보다 싸고 질 좋은 종이를 떼다 공급해 온 아버지의 업(業)을 이어 받는 것은 당연한 순리였다.

 아들 김 씨는 또 장사에 대한 관심이 컸다. 군대를 제대한 김종성 씨는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가게 경영자로 나섰다. 하지만 시련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전라도와 충청도, 경기도 등지에 있는 종이 공장에서 물건을 떼어 파는 대신 대기업 대리점 형태로 장사를 하면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마진은 나날이 떨어졌다. 물건을 팔기 위해 제주도를 빼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머리 속에서 ‘남 좋은 일만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김 씨는 대기업 대리점을 접고 다시 예전 방식으로 장사를 벌였다.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지기 직전이었다. 김 씨가 가맹한 대기업 본점은 그 때 문을 닫았다. 순간의 선택이 한양지업사를 살린 셈이었다.

 IMF 외환위기를 무사히 넘겼지만 사업의 암초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1대 김인배 사장이 13㎡ 규모로 시작해 2층 목조 건물로 확장한 가게 건물이 2005년께 원인 미상의 화재로 완전히 불타 버린 것이다. 김종성 2대 사장은 아내 이정옥(1954년생)씨와 아들 김정택(1980년 생)씨의 든든한 지원으로 건물을 새로 짓고 재기에 성공했다. 건물은 더 크고 더 넓게 지어졌다.

▲ 건물 내부 한쪽에 ‘오래된 가게 노포’ 포스터가 부착돼 있다.
 김 씨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아 365일 연중무휴로 새벽 5시에 일어나 오전 7시30분에 가게 문을 열고 밤 8∼9시에 셔터를 내리고 있다. 그의 아내 이정옥 씨도 서울에서 인천으로 시집 온 이래 김 씨와 같은 길을 묵묵히 걸어 오고 있다. 아내 이 씨는 동네에서 마음씨가 좋기로도 유명하다. 금창동 주민자치위원회 부위원장을 10년 넘게 맡아 오면서 홀몸노인과 다문화 가정을 위해 무료 도배·장판 교체활동 등의 봉사를 힘 닿는 데까지 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박남춘 인천시장은 이 같은 이 씨의 헌신적인 활동을 인정해 표창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2008년부터 한양지업사는 아들 김정택 씨가 3대 경영자로 나서 운영하고 있다. 물론 김종성·이정옥 씨도 늘 가게에 나와 물건들을 살뜰히 챙기고 있다.

 66년 전통의 한양지업사의 명성은 지금도 하루 30명 이상의 고객들이 이곳을 드나들게 하고 있다. 인심 좋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벽지와 장판 등을 손님들은 잊지 못하고 있다.

▲ 김종성 한양지업사 사장이 다양한 벽지와 장판 등을 보여주며 상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종성 대표는 "우리는 여전히 예전 방식으로 물건을 팔고 있다"며 "샘플 카탈로그만 보고 물건을 고르는 요즘 인테리어 가게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했다. 김 대표는 "창고와 매장 안에 물건이 수북히 쌓여 있어야 마음이 든든하다"며 "손님들이 가게에 오셔서 직접 눈으로 물건을 만져보고 골라서 사갈 수 있는 전통적 방식을 앞으로도 유지하겠다"고 했다.

 그는 "세상이 아무리 빨리 변해도 오래된 가게, 노포들이 지역에서 소중한 문화적·역사적 자원이 될 수 있도록 인천시와 지자체가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지켜 줬으면 한다"며 "그것이 진정으로 다음 세대를 위하는 길이다"고 강조했다.

김종국 기자 kjk@kihoilbo.co.kr

사진=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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