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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뚝 솟은 계양산 정기 받아 ‘희망의 길’을 찾다

계양구와 함께 걸어온 ‘효성마을’

박정환 기자 hi21@kihoilbo.co.kr 2019년 05월 13일 월요일 제4면

효성동(曉星洞)의 운명은 계양구(桂陽區)의 그것과 닮아 있다. 계양 땅은 본디 부평·계양·서구 등지 인천 북부지역 중에서도 맏형 격이다. 인천시유형문화재 제2호(제1호는 미추홀구 관교동 인천도호부청사)인 부평도호부청사(계양구 계산동 943)가 있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면서도 ‘계양’은 이름 없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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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성마을 전경
 계양은 1995년 3월 북구에서 떨어져 나오기 전까지 제 이름조차 가질 수 없었다. 분구(分區)로 비로소 ‘계양’이라는 이름을 찾았지만 부평의 등치에 눌려 한낱 서울과 가까운 위성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계양산(해발 395m) 자락과 천마산 중구봉(해발 276m) 기슭에 가냘프게 웅크리고 있는 ‘효성마을’도 본래 제 이름이 아니었다. 억새풀만 무성한 벌판의 ‘새풀’, 말(馬) 먹이 풀이 자라던 초원 ‘새벌’이 한자 이름인 ‘효성(曉星)’으로 바뀌었을 것이라는 짐작뿐이다. 옛 마을 ‘효성’에는 가난했던 시절의 서러움이 서려 있다.

 그 가난은 남루함만으로 채워진 하염없는 가난이 아니었다. 꿈과 희망이 서서히 그리고 조금씩 자리를 넓혀 가는 견딜 만한 떨쳐 낼 수 있는 가난이었다. 효성동은 1965년 6월 16일 인근 갈산동·작전동 등지 70만3천㎡와 더불어 수출공단으로 낙점됐다. 터 닦기 공사에서 등짐을 지고 벽돌을 날랐을 8만여 명의 인부들에게 효성동은 가난의 짐을 벗는 통로였다. 1만여 명에 달하는 수출단지 노동자들에게는 배 곪던 삶에서 삼시세끼로 속을 채울 수 있는 생애로의 변곡점이 바로 효성동이었다.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출근길 서쪽 하늘의 새벽 별을 보면서….

 효성마을은 도로로 갇혀 있다. 하늘 위에서 본 효성동은 흡사 도심 속 섬이다. 산곡동 인근 백마장을 잇는 마장로와 서구 루원시티에 이어지는 간선급행버스(BRT)가 달리는 봉오대로, 옛 가정오거리에 닿는 아나지 고갯길로 둘러싸여 있다. 어디 그것뿐인가. 도로 건너편은 온통 고층 아파트 단지가 포위해 옴팡져 있다. 내비게이션 없이는 찾기조차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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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성마을 주변에 지어지고 있는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
 효성마을의 미래는 길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과거의 길 속에 효성마을이 새롭게 엮어낼 얘깃거리와 내일의 길이 있다. 지척에 계양산이 우뚝하다. 고려 후기 문장가 이규보(1168~1241)는 부평도호부사로 좌천되자 먹먹한 가슴을 달래려고 계양산과 천마산 사이 징매이고개 근처 사찰 만일사(萬一寺)에 올랐다. ‘큰 배가 파도 가운데 떠 있는 것이 마치 오리가 헤엄치는 것과 같고, 작은 배는 사람이 물에 들어가서 머리를 조금 드러낸 듯하며, 돛배가 가는 것이 사람이 우뚝 솟은 모자를 쓰고 걷는 모양새고, 뭇 산과 여러 섬은 묘연하게 마주 대하여…’ 이규보의 「계양망해지(桂陽望海誌)」 속 한 구절이다.

 이규보가 계양산에 올라 본 것은 서른네 개의 섬이 하늘의 별처럼 박혀 있는 오류·경서·원창·가좌 등지의 서곶의 창해(滄海)였다. 북쪽으로는 강화도를 품은 채 바다의 짠물과 강의 민물이 밀고 당기면서 서로 몸을 섞는 한강하구가 훤했고, 동쪽으로 원통내(元通川)와 맑은내(淸川), 돌내(石川) 등 삼강(三江)이 만들어 낸 갈대 우거진 부평 뜰의 장두못(長陶池)이 발 아래였다.

 계양산은 중국으로 통하는 큰 길목이었다. 고려시대와 한양으로 천도한 조선왕조에도 북쪽 등성이는 여전히 충청과 전라·경상 등지 삼남지방과 왕도를 잇는 통로였다. 길이 8㎞의 징매이고개, ‘경명현(景明峴)’이었다. 이런 까닭에 징매이고개를 중심으로 계양산에는 도적떼들이 들끓었다. 한국 소설의 거장 벽초 홍명희는 장편소설 「임꺽정」에서 주인공이 한때 산채를 세우고 활보했던 공간적 배경을 이곳으로 세웠다.

 경명현의 또 다른 이름은 ‘천명(千名)고개’이다. 도둑이 워낙 많고 사납다 보니 천명을 모아야만 안심하고 고개를 넘을 수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시대 충렬왕과 계양산의 인연은 떼려야 뗄 수 없다. 그 이전 국영 매방은 수도 개성에 있었던 터라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훈련시키던 매가 민가의 닭이나 오리를 공격했던 탓이었다. 충렬왕은 ‘백성들의 피해가 없는 한적한 곳에 매사냥 터를 만들라’며 왕명을 내렸다.

 매사냥 터를 물색하던 신하들은 계양산 자락에 당도하고 나서야 한숨을 돌렸다. 풀밭에 꿩과 토끼 등 사냥감이 사방에 널려 있고, 멀리 보이는 서해의 풍광이 임금도 홀릴 만했다. 그 뒤 세인들은 매(鷹)를 징발(徵發)해 키운다고 해서 ‘징매’ 또는 ‘징매이고개’로 불렀다. 충렬왕은 국영 매방이 있던 계양산 일대의 도호부를 한 등급 높여 목(牧)으로 승격시켰다. ‘길주(吉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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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성마을 내 40년 이상된 노후 빌라. 이곳에 LH가 가로주택정비사업을 추진한다. 이승훈 기자 hun@kihoilbo.co.kr
 계양산의 또 다른 이름, 안남산에는 유명한 물건이 있었다. 부싯돌이었다. 임진왜란에서 참패한 조선은 화승총을 만들고 화약과 함께 심지에 재빨리 불을 붙일 수 있는 부싯돌을 연구했다. 그 중심에는 정두원이라는 무관이 있었다. 정두원은 전국의 부싯돌 생산지를 수소문하다가 요기나 하려고 부평의 주막에 들렀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려던 주모가 마른 쑥으로 만든 부싯깃에 대자마자 불길이 이는 부싯돌을 보고, 그 부싯돌의 출처를 캐물었다. 부싯돌로는 최고로 치는 석영 원석이 안남산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안남산 석영을 캐 군사용 부싯돌을 대량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전국 저잣거리에서 "단 한 번에 일어나는 부싯돌, 부평 안남산 부싯돌요"하면 사람들이 몰렸다. 군사용뿐만 아니라 포수에게도 애용됐다. 대궐이나 사대부 집에는 여지없이 안남산 부싯돌을 썼다. 부싯돌 하면 ‘안남산 부싯돌’이었다.

 효성마을은 계양산과 천마산을 잇는 둘레길 언저리에 있다. 둘레길을 찾는 등산객들에게서 효성마을의 자생력을 찾을 수 있을 법도 하다. 이곳 사람들은 쌈지공원을 조성하고 마을 입구에 상징 조형물을 세울 생각이다. 송골매나 부싯돌도 상징물로 설 수 있겠다 하는 생각도 든다.

박남춘 시장은 "시민이 주인인 인천형 도시재생을 강조하는 만큼 효성마을의 역사와 문화, 주민의 바람이 담긴 마을재생이 이뤄질 거라 기대한다"며 "민선7기 출범 초 정무부시장을 균형발전정무부시장으로 명명해 원도심 활성화를 총괄하고, 폭넓은 민관 거버넌스를 운영해 주민이 직접 참여해 마을을 살리는 소규모 마을재생사업에 힘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국비 지원이 되는 정부의 도시재생 뉴딜사업은 5년간 20개소 추진이 목표로, 원도심 곳곳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시는 원도심의 저층주거지를 되살리는 ‘더불어 마을’, ‘빈집은행’ 구축 등의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병행하고 있다"며 "주민들의 바람과 아이디어를 반영하고, 원주민이 돌아오고 그들을 중심으로 일자리와 문화가 넘치는 마을재생이 이뤄지게 하겠다"고 덧붙였다.

 박정환 기자 hi21@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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