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曉星)마을 언저리에는 인천이 제 이름을 갖기 전 아주 오래된 흔적들이 서려 있다. 그곳엔 격랑의 근현대사를 몸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절박하고도 소박했던 삶의 자국이 어려 있다. 멀어서 새롭고, 가까워서 사귀어질 수 있는 생애의 이야기들이 수북하다.

계양산(桂陽山) 아랫말 효성마을은 고려 충렬왕의 기개가 엮어낸 사냥 매(鷹)의 얘기와 계양도호부사로 좌천된 고려 후기 최고의 문장가 이규보의 가슴 먹먹한 사연을 담고 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 이곳의 석영 원석이 최고의 부싯돌로 자리매김하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효성마을에는 인생의 애환과 희망도 담겨 있다. 허기조차 달래기도 쉽지 않았던 시절 전국의 가난한 자들은 일제강점기 부평의 조병창(造兵廠)과 1960년대 청천동과 효성동을 아울렀던 인천수출공업단지로 몰려들었다. 서쪽 하늘의 새벽 별을 보면서 공장으로 출퇴근을 반복해야만 했던 남루한 자들에게 효성마을은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안식처였다.

늙은 효성마을은 지친 듯 낡음 속으로 빨려 들고 있다. 불 꺼질지 몰랐던 풍산금속과 수출공단 주변 일반공업지역 공장들은 IMF 외환위기 이후 내리막길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관련 기사 2~7면>
효성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은 아파트도, 상가도 아니다. 바로 ‘노인문화센터’다. 효성마을(효성1동 169- 12·11만3천㎡)이 도시재생을 이제 막 시작했다. 얘깃거리가 피어오르고 싱그러움이 샘솟는 오래된 마을이기를 기대해 본다.

박정환 기자 hi21@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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