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을 끼고 있는 광주시 중부면 광지원리에는 조선시대부터 둔전(屯田-군사 요지에 주둔한 군대의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설치한 토지)이 있어서 둔전병들이 군악으로 농악을 쳤고, 또 조선시대 통신 방법인 남산역과 관영 숙박시설인 황교원(黃橋院)이 있어서 지역 경제가 활성화됐던 만큼, 풍물도 매우 왕성하게 전승돼 왔다.

 하지만 이 지역 또한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은 후 도시화와 산업화가 급격하게 진행된 20세기 후반에는 마을 주민들이 고령화되고, 풍물의 기능이 쇠락하면서, 정월 초의 지신밟기나 정월 대보름날 등 세시풍속과 관련해서만 명맥을 이어왔다.

▲ 광지원 농악 공연.
 광지원리의 풍물이 1990년대까지도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에서 200년 이상 지속돼 온 재인들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지원리는 서울과 남한산성의 교차로에서 남한산성 입구가 시작되는 곳에 위치하며, 현재 72가구 146가구가 모여 살고 있다.

 대부분의 지형이 완만한 구릉지대이며, 광지원초등학교가 위치한 ‘안말’, 길 건너 바깥에 위치하는 ‘바깥말’, 광지원교를 건너 섬처럼 떨어져 있는 ‘섬말’로 이뤄져 있다. 이 마을에는 예전의 통신 방법으로 이용됐던 남산역이 있었고, 또 조선시대의 관영 숙박시설인 황교원(黃橋院)이 있던 자리이다.

 이곳에 원(院)을 두었던 것은 조선시대(朝鮮時代) 왕들이 여주에 있는 영릉(英陵 세종대왕 陵)과 영릉(寧陵) 행차 시 이곳에서 쉬어 가게하기 위함이었는데, 인근에 큰 연못이 있어서 그 물이 맑고 달빛에 반사돼 빛을 발하자, 그때부터 이곳을 ‘광지원’(光池院)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이 마을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에 신작로(新作路)가 개통되면서 교통의 중심지가 됐고, 예로부터 남한산성의 관문지역으로 유명하다. 마을도 단일 부락으로 조선 초기부터 형성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처음 마을에 들어온 사람은 은씨(殷氏) 성(姓)을 가진 사람으로 전해지지만, 조선 숙종(肅宗)때 진주 강씨(晋州 姜氏)가 들어오면서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기 시작했고, 그 밖에도 이씨(李氏)·정씨(鄭氏)·김씨(金氏) 등이 모여 살고 있다.

 광주시 중부면 광지원리에서 전승되는 농악의 역사는 전승자들의 구술에 의해 적어도 100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승자들의 구술에 의하면 1880년께 출생한 조병희가 1900년대 중반까지 이 동네의 상쇠(농악패에서 꽹과리를 치는 잽이 중에서 가장 앞에서 전체 음악을 지휘하는 역할)를 하고, 그 후로도 유영복, 조응태, 강암석, 정영진, 조현태 등의 재비(전통연희의 악사)들이 1990년대까지도 활동을 했기 때문에 이 마을의 농악은 적어도 100년 이상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광지원리에서 달맞이 의식의 하나로 전승되는 해동화(海東火-동리의 안녕이나 풍농을 위해서 겨우내 얼었던 것을 녹인다는 풍습) 놀이도 무려 400년 전부터라고 하기 때문에, 이 놀이에 빠질 수 없는 광지원농악의 역사 또한 적어도 이 시기까지는 소급할 수 있을 것 같다.

 광지원리에서는 1970~80년대까지도 안말과 바깥말, 섬말의 재비들 25~30여 명이 정월 초이튿날부터 대보름 전날까지 집집을 돌며 지신밟기를 하고, 대보름날에는 개개인이 마련한 나뭇단을 한꺼번에 모아놓고 태우는 해동화놀이를 하며 온 마을이 대보름 행사를 즐겼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농번기에는 모심을 때와 김맬 때 논으로 나가고 들어오는 길에 풍물을 쳤고, 그 밖에도 동네의 경사스러운 일이나 개인의 회갑연 등에서도 풍물을 치는 등 근래까지도 풍물이 활발히 전승됐던 것 같다. 특히 이 지역에는 20세기에 몇몇 재인들이 거주하기도 해서, 풍물을 놀 때 함께 초청받은 재인들이 줄타기도 했다고 한다.

▲ 광지원 농악 공연.
 광주시 곳곳에서는 30~40년 전만 하더라도, 길에서 농악대가 서로 부딪치면 서로 농기의 끝에 있는 꿩 장목을 뺏는 기(旗) 싸움을 벌이곤 할 정도로 그 열기가 상당했었다.

 이처럼 광지원리의 농악은 그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명맥을 이어왔지만, 주민들의 고령화, 잦은 이주에 의한 주민 수의 감소 등으로 인해 1990년대 말에는 단절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마을의 해동화놀이가 계속돼 왔고, 이 놀이에 농악이 없을 수 없기 때문에 근근이 명맥은 이어왔다.

 그러던 상황에서 광지원농악은 1997년 광주중앙고에 ‘농악단’이 창설되면서, 광지원리의 농악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당시 학교장의 지원과 민성기 교사의 지도하에 광지원 농악단이 만들어졌고, 여기에 광주시와 광주문화원의 후원이 이뤄지면서, 오늘날 광지원농악단의 모태가 되는 풍물패가 결성됐다.

 이후 광지원농악단은 지역의 전통을 잇고 있는 광주시 내의 여러 마을의 농악을 광주문화원의 도움으로 수소문하게 됐고, 그 와중에 광지원리의 농악이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 이 동네에서 상쇠를 맡았던 강보석(1922년생) 마을 어르신을 만나게 된다.

 이후 광지원농악단은 1997년부터 2년 정도를 강보석 선생을 학교로 모셔서 광지원리의 풍물가락인 이채, 삼채, 칠채, 세마치, 길군악 등 기본적인 가락과 판제를 배웠다. 또 비슷한 시기인 1998년부터는 광지원리의 농악을 기억하고 있는 안성농악의 김기복 선생을 모셔서 일부 지도를 받았는데, 예를 들면 강보석 선생이 전수한 것 중 사통백이에서 춤 동작과 가락의 끝이 안 맞는 것을 매끄럽게 다듬는 작업이나 판굿을 무대화 하는 작업 등이었다.

 이렇게 다양한 발굴과 복원에 힘입어 광지원농악은 1999년 ‘제1회 경기도 4-H 전통 민속문화 경연대회’에 출전해 대상을 받는 등 이후 많은 경연대회와 예술제에서 최고의 상을 휩쓸게 된다.

 광주시는 2010년에 ‘광주시립 광지원농악단’을 정식 발족하게 돼 광지원농악보존회, 광주시립광지원농악단, 광주중앙고등학교 광지원농악반 등 광지원 농악의 보존과 전승을 위한 다양한 단체들이 각종 대회와 공연 활동을 하게 되고 다양하고 풍성하게 광지원농악을 보존하고 전승시킬 수 있게 됐다.

 현재 광주 광지원의 농악은 광지원농악보존회와 광주시립 ‘광지원농악단’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지만 이와 직접적으로 연계되는 광주중앙고에서도 전승되고 있다.

 학교에서 광지원농악을 익힌 학생들 중에는 사회로 진출한 다음 광지원농악 보존회와 광주시립 ‘광지원농악단’으로 이어지므로, 보존회와 시립 또한 지속적으로 뛰어난 인재를 충원할 수 있는 인프라가 구축된 셈이다.

 지역사회의 행정적, 재정적 지원과 지역의 전통문화를 발굴, 보존해야 한다는 지역민들의 의지에 힘입어 광주 광지원농악은 그 어떤 지역보다도 그 전승의 앞날이 열려 있다.(출처 경기도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정진욱 기자 panic82@kihoilbo.co.kr

사진=경기도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본 내용은 민성기 광주광지원농악보존회 대표가 ‘광주문화’에 수록한 글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으로, 일반 학계의 주장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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