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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째 ‘한의학의 정수’ 펼치고자 치료법 끊임없이 대조·연구

미추홀구 영제한의원

홍봄 기자 spring@kihoilbo.co.kr 2019년 05월 24일 금요일 제15면

▲ 노승조 영제한의원 3대 원장이 지난 20일 인천시 미추홀구 숭의동의 의원 약제실에서 약제를 살펴보고 있다.
길 영(永), 구할 제(濟)의 의미를 담은 영제한의원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업주이자 1대 원장인 노학영 원장은 일제강점기 무의도로 피난을 갔다가 한의학을 공부했다. 생계를 잇기 위한 수단이었다. 가진 것이 없었기에 치료를 해 주고 그 대가로 쌀 한 줌을 받았다. 모두가 궁핍한 시절이었다. 창업주의 의술은 일본의 관료들에게도 소문이 났다. 정치적 관계보다 아픈 사람은 치료해야 한다는 의료인의 책임이 앞섰다.

 영제한의원은 대한민국이 해방된 1945년을 공식적인 경영 시작 연도로 삼았다. 풍수지리에도 능했던 1대 원장은 미추홀구 숭의동 현재 터에 기와집으로 건물을 세웠다. 영제한의원의 전신인 ‘영제침료원’이라는 간판도 올렸다. 당시 숭의동은 하나의 부락이었다. 집들이 개인 소유로 구분되지 않은 채 공동으로 모여 살았다. 창업주의 의술은 유명해져 하루에 이 300명 정도 되는 환자들이 한의원을 찾았다.


 당시에는 집과 한의원의 구분도 없었다. 환자들이 방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으면 순차적으로 진료하는 방식이었기에 동시에 여러 명을 진료할 수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콜레라 등 전염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도 한의원을 찾는 이들이 많았다. 아픈 곳이 생기면 동네 한의원을 먼저 찾아 치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한의사가 약을 지어주면 환자들은 하루에 세 번 정성을 들여 달여 먹었다.

 2대 원장인 노두식(70)씨가 한의원을 이어받은 1978년에는 한의학의 위상이 많이 변해 있었다. 서양의학이 보편화됐고, 한의학은 그보다 못한 것으로 인식했다. 서양식 병원을 먼저 찾고 한의원은 차선책이 됐다.

▲ 노승조 영제한의원 3대 원장이 책장에 놓여 있는 아주 오래된 의학서적을 들어보이고 있다. 이 서적들은 노학영 초대원장이 자주 보던 것이다.
 노두식 원장은 한의학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독일과 영국 등 유럽의 침구학술대회에 참여해 많은 노력을 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침구학회 학술이사직도 맡았다. 2대 원장이 창업주 밑에서 일을 배울 때는 쉬는 날도 구정과 추석 오전으로 일 년에 단 두 번이었다. 그 시대에는 쉼 없이 일하는 것이 당연했다.

 2대 원장은 새로운 치료 방법이 나오면 전해 내려온 비법과 끊임없이 대조하고 공부했다. 병을 잘 고쳐야 한다는 일념 하나였다. 이 같은 노력 때문인지 영제한의원은 업계가 어려울 때도 입소문을 타고 성업했다.

 1대와 2대 사이 영제한의원은 새 건물로 옮겼다. 지금까지 쓰고 있는 한의원 건물 옆집 터는 주차장으로 단장했다. 이에 비해 주변 환경의 변화는 더뎠다. 1968년 남구청(현 미추홀구청)이 근처에 들어오며 활기를 띠는 듯했지만 곳곳의 옛 건물들은 그대로였다.

 느린 마을에서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다 보니 한의원에는 단골손님이 많은 편이다. 창업주가 한의원을 운영했을 때부터 찾던 환자들이 4대를 이어 진료를 보러 온다. 4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2대 원장에게 손주가 먹을 한약을 지으러 오는 손님들도 적지 않다.

 오랜 손님들은 2대 원장을 찾지만 처음 한의원을 찾는 대부분의 환자는 3대 노승조(44)원장이 맡아 본다.

 노승조 원장은 2010년부터 아버지인 2대 원장과 함께 영제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3대 원장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환자들을 고치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1대 원장인 할아버지가 가정집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모습과 마당에서 놀던 기억이 생생하다.

▲ 인천시 미추홀구 숭의동의 영제한의원 내부에는 아주 오래된 약제함이 전시돼 있다. 이 약제함은 노학영 1대 원장이 사용했던 것이다.
 노승조 원장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 반 만큼만 하라’는 얘기를 들으며 자연스럽게 한의사를 꿈꿨다. 가업을 이어받는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환자를 고치는 선대의 모습을 존경했다.

 3대 원장 역시 2대 원장과 같은 고민을 한다. 한의학이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편견을 없애고 우수성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다. 이를 위해 ‘신뢰’와 ‘치료 성과’라는 영제한의원의 가치를 최우선에 두고 있다. 경영을 위한 과잉 진료보다는 신의를 쌓는 것을 우선시 하라고 배웠다.

 그는 한의원이 3대째 자리를 지키는 비결을 환자와의 신의로 설명했다. 2대 원장이 70세가 넘은 지금까지 치료법을 공부하는 것처럼 노승조 원장도 제대로 치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최근 영제한의원에는 작은 변화가 생겼다. 과거에 머물러 있던 숭의동 일대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소형 아파트와 신축 빌라들이 들어서면서 한의원에도 젊은 환자들의 발걸음이 늘었다.

▲ 인천시 미추홀구 숭의동에 위치한 영제한의원 전경.
 3대 원장은 젊은 손님들이 치료 시기를 놓치지 말고 제때 한의원을 찾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약국이나 병원에 먼저 갔다가 잘 낫지 않아 한의원을 왔을 때는 치료 시기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선대가 그러했던 것처럼 치료 성과를 내고 신뢰를 쌓으면 지금의 손님들과도 대를 잇는 인연을 맺을 수 있을 터다.

 노승조 원장의 바람은 아버지가 앞으로도 오래도록 영제한의원을 이끌어 주는 것과 가업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길이 구제하고 영생한다는 한의원 이름처럼 창업주의 정신을 대대로 이어가고 싶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보고 꿈을 키운 3대 원장처럼 그의 아들도 한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해 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부모가 걸어온 길을 뒤이어 밟으면서 자라난 존경심을 아들도 경험할 수 있었으면 한다. 언젠가 아들과 함께 할 미래에는 환자들의 마음까지 치료하는 영제한의원이 되기를 바라 본다.

 노승조 원장은 "요즘 진료를 하다 보면 마음에 걱정을 쌓아 두고 풀지 못한 환자들이 많다"며 "환자들이 언제 오더라도 편하게 진료받고 갈 수 있도록 가업을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홍봄 기자 spring@kihoilbo.co.kr

사진=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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