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대표적 유적지인 남한산성에서 지난 3월 31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가 주최하고 ‘남한산성을사랑하는모임(남사모 시민연대)’ 주관으로 열린 이 행사는 100년 전 남한산성에서 보여 준 선조들의 애국심과 민족정신을 기리고, 평화통일과 세계평화의 염원을 널리 펼치고자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시민들과 함께 마련됐다.

 행사에 모인 수백 명의 사람들은 남한산성에서 함께 만세를 외치며 대한민국이 영원한 독립국가임을 되새기면서 남한산성의 호국정신을 기념했다.

▲ 남한산성에서 열린 3·1 독립운동 100주년 기념행사. <남사모 제공>
# 남한산성의 3·1운동과 신간회 광주지회 활동

 일제의 산성마을 침탈과 가혹한 식민 탄압, 경제 수탈에 분노한 광주 민중들의 저항은 1919년 민족적 만세운동과 함께 분출됐다.

 광주군의 3·1만세운동은 3월 26일 중대면 송파 일대에서 시작돼 저녁까지 진행됐다. 3월 27일 새벽부터 광주와 성남 일대에서 일기 시작한 만세시위운동은 남한산성 마을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1919년 당시 광주군 중부면은 면 소재지인 산성리를 비롯해 13개 동리로 구성돼 있었으며, 중부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운동은 성남출장소 관내 단대리·탄리·수진리 주민 300여 명이 주도했다.

 광주 남한산성에서의 만세운동은 주동 인물이 밝혀지지 않아 자세한 경과를 알 수 없으나 이날 새벽 남한산에서 횃불을 밝히고 이를 신호로 시작됐다.

 단대리·탄리·수진리 주민 300여 명은 남한산성 남문에 집결해 만세를 부른 후 산성 안으로 진입,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단순 시위운동에서 방향을 전환한 것은 시위대가 면사무소에 집결하면서 나타났다. 평소 일제에 적극 협력한 당시 중부면장에 대한 감정이 폭발, 일부 시위대가 면장을 끌어내어 곤봉으로 폭행해 실신시켰다. 결국 경비 중이던 일본 헌병이 총기를 발사해 시위운동을 좌절시켰다.

 일제는 광주 일대의 시위 주도자인 돌마면 율리(현 율동) 출신의 한백봉 등 수십 명을 3월 29일 체포해 판교의 헌병주재소로 연행했다.

 일제는 시위자들을 남한산성의 용인헌병분견대 광주분견소에 이송해 4일간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그 후 대부분의 인사들은 방면됐으나 한백봉은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을 거쳐 서대문감옥에 이감돼 1년을 복역했다.

 이후 만세시위는 곤지암과 실촌면, 남종면 등 광주 전역으로 확대돼 4월 6일까지 전개됐다.

▲ 광주 3·1독립 운동 기념탑.
# 남한산성 인근의 계몽운동

 거국적인 3·1만세운동 이후 1920년대 들어서는 전국의 농민과 노동자들이 민족적 자각을 하고 의식 개혁을 위한 계몽활동을 적극 벌여 나갔다. 농민들은 일제와 친일지주의 토지 수탈에 맞서 소작쟁의를 벌였고, 노동자들도 전국의 생산현장에서 공제회와 조합을 조직해 의식 개혁 운동을 전개했다.

 남한산성 마을에서도 식산조합과 공제회를 통한 계몽활동이 일어났다. 광주군 산성마을 안에는 1917년 무렵부터 남한산구락부가 창립됐는데, 1927년에는 회원이 300여 명에 달했다.

 이어 1920년 5월 1일 산성마을에 광주남한식산조합이 조직된다. 설립 당시 자금은 5만 원이었으며, 회원은 42명이라고 한다.

 또한 1923년 12월 1일 마을 주민 최기철을 회장으로 한 광주남한공제회(후에 노동공조회로 개칭)가 설립됐다. 이 모임은 회원 73명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광흥학교 3회 졸업생인 석혜환과 박준호 등이 주로 참여했다.

 노동공조회는 노동자와 농민들을 대상으로 강연과 야학을 개최했고, 광주공동조합을 통한 공개 활동도 벌여 나갔다.

 공조회 활동에 앞장선 이들은 학교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일제의 식민교육을 거부하는 마을 주민들을 위해 야학활동도 전개했다. 석혜환은 1926년 7월 20일 초등학교 뒷산에 남한산노동야학원을 설립했다. 이곳에서는 생도 50명이 무료 교육을 받았다고 하는데, 원장은 최기철이 맡았다.

 야학활동은 1930년대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1933년 2월 남한산 농민야학이 10세 전후의 남녀 어린이 50여 명을 교육했다. 농민야학은 노동공조회관을 빌려 학예회를 개최하기도 했는데, 참석한 부모들과 미신 타파를 위한 좌담회를 개최했다.

 이러한 비정규 교육시설은 교육기관이 부족했던 광주지역 주민들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하는 농촌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됐다.

 이 밖에도 남한산성 내에는 소비조합이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산성마을 주민 중 일부 지식청년들은 1927년 민족적 연합운동단체인 신간회의 광주지회를 설립하는 일에도 적극 참여했다. 신간회 광주지회 설립은 1927년 5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에서 ‘민족단일당론’이 대세를 장악하게 된 이후 급속하게 진행됐다.

 ‘조선일보’ 1927년 7월 10일 기사에서는 "광주군에서 유지제 씨의 발기로 조선민중의 총역량을 집중하고 조선 민족 단일당인 신간회 지회를 설치하고자 임시사무소를 송파중앙청년회 내에 설치하고 회원을 모집하며 지회 설립 준비에 노력하고 있다"고 보도돼 있다.

▲ 신간회 광주지회. <남한산성일대 독립운동사 자료집>
# 신간회 광주지회 설립

 여러 차례 회의를 거듭한 끝에 8월 14일 중부면 산성리 동문 쪽에 있는 사찰로 유일하게 전소를 면한 장경사에서 20여 명의 대표자들이 모였다.

 8월 24일 오후 1시 30분 남한노동공조회관에서 신간회 광주지회 설립대회가 개최됐다. 임시 의장인 한순회의 사회로 경과보고를 거쳐 강령과 규약이 낭독됐다. 이어 임원선거에 들어가 지회장에 한순회가 선임됐고, 부회장에 산성마을 출신인 석혜환이, 간사로는 한백봉·한백호·이대헌·유인목·박기환·한용회 등이 선출됐으며, 지회를 경안리에 두기로 하고 오후 4시 30분께 폐회했다.

 참가자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주로 돌마면 출신의 한순회 등 천도교 구파세력과 산성리 출신의 석혜환 등 젊은 사회주의성향의 지식인들로 구성됐음을 알 수 있다.

 신간회 광주지회는 이듬해인 1928년 12월 20일 오후 3시 제3회 정기총회를 열어 지회장에 석혜환을, 부회장으로 한순회를 선출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문맹 퇴치와 소비조합 설립 문제, 미신 타파와 회원 모집의 건, 회비 징수의 건 등이 논의됐다.

 석혜환 지회장은 나아가 1929년 1월 원산에서 일어난 부두노동자 총파업에 격려문을 발송했는데, 이 일로 인해 10일간 구류에 처해지기도 했다.

 총무간사인 변중희도 2월 22일 같은 이유로 구류 10일에 처해졌고, 남한산노동공조회 상무이사인 연제홍도 3월 5일 구류 5일 처분을 받았다.

  정진욱 기자 panic82@kihoilbo.co.kr

  사진=경기도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제공

※본 내용은 김명섭 위례역사문화연구소 연구실장(문학박사·남사모 사무국장)이 작성한 ‘일제의 남한산성 침탈과 주민들의 저항 사례연구’ 글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으로, 일반 학계의 주장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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