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시절 얘기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언제부터 없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1년에 한 번인가 두 번인가 채변봉투를 제출했다. 한국건강관리협회와 한국기생충박멸협회에서 학생들의 기생충을 검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채변봉투 제출일이 다가오면 며칠 전부터 식은땀이 나기 일쑤였다. 비록 코흘리개였지만 친구들 앞에서 ‘치부’를 드러내야 한다는 수치심에 등교 자체가 곤욕이었다. 어떤 녀석은 지금의 500원짜리 동전 크기만한 변을 담았다가 ‘왕변’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채변은 손바닥 크기의 하얀색 또는 누런색 봉투 속에 들어있는 비닐봉지에 담아 제출했는데 밖에서 내용물의 크기가 훤히 보일 정도였다. 친구들을 놀려먹을 요량으로 그것만 관찰하던 녀석이 있었다.

 집에서 채변을 한 경우는 비닐봉지를 성냥불로 지져 밀봉을 한 덕에 그나마 냄새에서 자유로웠지만 배변활동이 원활하지 않다며 학교에서 일을 보거나, 냄새 고약한 녀석의 그것을 여럿이 나누는 우정을 과시(?)한 경우에는 교실은 그야말로 암모니아 유출사고 현장을 방불케 했다. 간혹 어떤 녀석은 채변이 무슨 행운의 네잎클로버라도 되는 양 책갈피 속에 고이 넣어 가져오다 봉투가 터지는 대형사고를 일으키기도 했다.

 여하튼 그 시기 학창시절을 보낸 이라면 누구나 채변봉투에 얽힌 한두 가지 웃픈 에피소드를 가슴 한편에 간직하고 있다. 당시만 해도 누구나 몸 속에 회충·요충·편충·구충 등 각종 기생충을 키우던 기생충 전생시대였다.

 당시 화학비료를 구하는 게 여의치 않다 보니 인분뇨를 비료로 사용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토양오염으로 인해 각종 야채 등에 기생하던 기생충들이 소화기관을 타고 우리 몸속으로 손쉽게 유입되던 시기였다.

 "12살의 나이에 영화감독이 되기로 마음 먹었던 되게 소심하고 어리숙한 영화광이었습니다. 이 트로피를 이렇게 손에 만지게 될 날이 올지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화 ‘기생충’으로 지난 25일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수상소감이다.

 빈부격차의 문제를 다뤘다고 하는데 영화의 ‘ㅇ’도 모르는 기자가 더 이상 영화를 논하는 건 주제넘는 일이다. 중요한 건 내 몸속의 ‘기생충’이 내 마음의 ‘기생충’으로 진화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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