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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의 역사 견뎌온 충절의 마을 ‘강화 부흥시대’ 연다

강화 남산마을, 피폐했던 과거 딛고 풍족한 삶의 터전으로

최유탁 기자 cyt@kihoilbo.co.kr 2019년 06월 03일 월요일 제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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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하면 사람들은 가장 먼저 ‘마니산’을 떠올린다. 마니산은 강화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 지점에 있는 해발고도 469.4m의 산이다. 정상에 오르면 경기만(京畿灣)과 영종도(永宗島) 주변의 섬들이 가시권 안에 들어온다. 정상에는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했다는 참성단(塹城壇)이 자리잡고 있다. 지금도 개천절이면 이곳에서 제례(祭禮)를 올리고, 전국체육대회의 성화(聖火)를 채화한다.

 이 산의 정기를 받고 있는 강화도는 예부터 강화부(江華府)로 불렸다. 강화부 동북쪽은 강이 둘러싸고 있다. 서남쪽은 바다로 강화부 전체가 큰 섬을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한양을 지키는 나성(羅星) 역할을 하기도 했다. 「택리지」에는 강화부는 남북 길이가 100여 리이고, 동서 길이는 50리라고 적혀 있다. 강화도는 남북 길이가 약 28㎞(약 71리), 동서 길이는 약 16㎞(약 40리)이고, 면적은 405.2㎢이다.


 이렇듯 ‘역사의 고장’, ‘시의 고장’, ‘재물의 고장’이라고 불렸던 강화도는 우리나라 수난의 역사와 맥(脈)을 같이 해 왔다. 고려시대 삼별초의 난으로 벌겋게 피로 물들었고, 병자호란 이후 조선 말기에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로 열강의 수탈 현장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강화군 강화읍 ‘남산마을’ 역시 수난의 역사를 이어온 마을이다. 남산마을은 북측으로 강화대로가 인접해 있고, 동측으로는 지방도 84호선이 접해 있다. 주변에는 강화군청과 강화여객터미널, 강화풍물시장, 강화중앙시장, 강화문화원 등이 자리잡고 있으나 개발과는 거리가 먼 조그만 마을의 기능만 갖고 있을 뿐이다.

 이 마을 또한 역사는 유구하다. 고려 말 충신들이 조선의 개국을 반대하면서 수도를 떠나 터를 잡았던 곳이 남산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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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시 강화군 남산마을 전경.
 ‘남산리(南山里)’라는 명칭 역시 본래 부내면 지역으로 강화산성 남문 밖에서 부조개(扶助峴, 강화군 남산리 남문 밖 남쪽에 위치한 고개)를 거쳐 선행리 북편 남산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어 칭해졌다. 지금은 ‘서로 도와준다’는 의미의 부조현(扶助峴)으로 표기되고 있다. 하지만 원래 부조현(不朝峴)은 ‘새로운 왕조에 불복한다’는 의미의 지명이었다고 한다. 이 고개는 ‘고려 왕조의 신하들이 조선 개국 후 새 조정에 불복해 동참하지 않고 구신골(舊臣谷)로 은거하기 위해 넘은 고개’라는 유래를 갖고 있다. 지금도 남문 밖에 ‘부조마을’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여기서 말하는 ‘부조현구신골(不朝峴舊臣谷)’은 서기 1392년 7월 16일 고려가 끝나고 이성계가 새로운 조선 왕위에 추대되자 고려 신하들이 개성의 동남 방향 은거지를 찾아 지금의 강화읍 남산리 184 일원 주변 초로에 은신해 숨어 살자 조선의 건국 태조가 고려 신하를 신왕조에 출사할 것을 포섭하려 했으나 응하지 않고 아사(餓死)하거나 자진한 곳이 ‘구신골’이라 하고, ‘부조개(부조현)’란 마을의 지명도 얻게 됐다. 이성계는 이들의 충절을 높이 사 비문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 비문은 1954년 초여름 마을에 재앙이 닥쳐 강화읍 남산리 남문로길 개울의 돌다리로 사용됐다. 거북 모양의 비문 받침은 석수문 아래(옛 토끼다리)로 버려져 지금은 행방을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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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문석 시장 토산품센터를 찾은 주민들이 너도나도 화문석을 들고 있다. 화문석이 당시 강화지역 경제를 이끌었음을 보여준다.
 이영수 남산마을 노인회장은 "비석도 지금 어디쯤은 파면 나올 것이다. 하나 비문 받침은 석수문 아래로 뒀을 때 누가 가져갔는지 아니면 묻혔는지 알 방법이 없다"고 했다.

 남산마을에는 ‘선화골쪽우물’이라는 역사 깊은 샘물이 있다. 선화골쪽우물은 고려 충신 열사들이 즐겨 찾던 샘물로 ‘람정’이라 했다. ‘선화후과(先花後果)’란 딸을 먼저 얻고 아들을 얻는다는 뜻이다. 람정샘을 먹고 아들을 얻었기에 선화후과를 ‘선화골’이라 했단 얘기가 전해져 온다. 「강도지 람정난」에 이르기를 ‘물맛은 달고 시원하며, 가뭄에도 샘이 줄지 않고 솟아나며, 사시사철 샘을 찾는 이들이 모여들며 최근까지도 기우제, 산신제 등 지성을 드리는 정화수로 이용하는 이들이 있다’고 했다.

 남산마을의 ‘마근대미고개’도 유명하다. 남문 밖과 부조고개 사이 마을에 있는 고개인 마근대미고개는 지금의 검문소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역병이 발생하거나 강화산성 안에 주요 행사가 있을 경우 우선적으로 차단하거나 통제의 역할을 하던 고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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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미래지향아파트 자리에 위치했던 옛 우시장의 모습. 1960~1970년대 이곳에서 소 매매가 공식적으로 이뤄졌다.
 일제시대와 해방, 한국전쟁을 거쳐 근현대화의 물결이 몰아쳤던 1960~1970년대 남산마을은 우시장과 화문석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지금의 미래지향아파트 자리에 우시장이 열렸다. 2000년대까지는 강화토산품센터로 강화 특산품인 화문석을 거래하기 위해 5일장이 열리던 곳이기도 하다. 센터는 지금 강화문화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처럼 남산마을은 화문석, 방직산업 등으로 강화 지역경제를 이끌었으나 산업구조 변화로 젊은 층이 빠져나가면서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세월이 지날수록 주거환경은 더욱 열악해져 빈집은 계속 늘어 마을의 영화(榮華)는 점점 사라져 갔다. 역사의 얼이 숨 쉬고 있는 마을임에도 강화읍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를 받으면서 마을 주민들의 상실감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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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남산마을 주민들이 마을청소를 하다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남산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마을을 되살려 보자는 의지가 강하게 일어났다. 마침내 그 결실이 ‘강화 남산지구 도시재생 뉴딜사업’ 지정으로 돌아왔다. 현재 남산마을은 희망과 기대로 부풀어 있다. 이제 남산마을은 ‘지붕 없는 박물관’의 한 축이 돼 그 박물관의 주요 소장품이 될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비록 ‘도시재생’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사업에 대한 주민들의 기대는 대도시 도시재생 못지않은 큰 반향을 일으킬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남산마을 마을가꾸기 사업’이 섬마을 강화의 핵심 사업으로 시골 도시화 롤모델로 이어져 다시 한 번 주민들이 후덕한 마음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마을로 부흥하길 기대해 본다.

  최유탁 기자 cyt@kihoilbo.co.kr

  김혁호 기자 kimhho2@kihoilbo.co.kr

사진=강화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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