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산의 정기를 받고 있는 강화도는 예부터 강화부(江華府)로 불렸다. 강화부 동북쪽은 강이 둘러싸고 있다. 서남쪽은 바다로 강화부 전체가 큰 섬을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한양을 지키는 나성(羅星) 역할을 하기도 했다. 「택리지」에는 강화부는 남북 길이가 100여 리이고, 동서 길이는 50리라고 적혀 있다. 강화도는 남북 길이가 약 28㎞(약 71리), 동서 길이는 약 16㎞(약 40리)이고, 면적은 405.2㎢이다.
이렇듯 ‘역사의 고장’, ‘시의 고장’, ‘재물의 고장’이라고 불렸던 강화도는 우리나라 수난의 역사와 맥(脈)을 같이 해 왔다. 고려시대 삼별초의 난으로 벌겋게 피로 물들었고, 병자호란 이후 조선 말기에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로 열강의 수탈 현장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강화군 강화읍 ‘남산마을’ 역시 수난의 역사를 이어온 마을이다. 남산마을은 북측으로 강화대로가 인접해 있고, 동측으로는 지방도 84호선이 접해 있다. 주변에는 강화군청과 강화여객터미널, 강화풍물시장, 강화중앙시장, 강화문화원 등이 자리잡고 있으나 개발과는 거리가 먼 조그만 마을의 기능만 갖고 있을 뿐이다.
이 마을 또한 역사는 유구하다. 고려 말 충신들이 조선의 개국을 반대하면서 수도를 떠나 터를 잡았던 곳이 남산마을이다.
여기서 말하는 ‘부조현구신골(不朝峴舊臣谷)’은 서기 1392년 7월 16일 고려가 끝나고 이성계가 새로운 조선 왕위에 추대되자 고려 신하들이 개성의 동남 방향 은거지를 찾아 지금의 강화읍 남산리 184 일원 주변 초로에 은신해 숨어 살자 조선의 건국 태조가 고려 신하를 신왕조에 출사할 것을 포섭하려 했으나 응하지 않고 아사(餓死)하거나 자진한 곳이 ‘구신골’이라 하고, ‘부조개(부조현)’란 마을의 지명도 얻게 됐다. 이성계는 이들의 충절을 높이 사 비문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 비문은 1954년 초여름 마을에 재앙이 닥쳐 강화읍 남산리 남문로길 개울의 돌다리로 사용됐다. 거북 모양의 비문 받침은 석수문 아래(옛 토끼다리)로 버려져 지금은 행방을 알 길이 없다.
남산마을에는 ‘선화골쪽우물’이라는 역사 깊은 샘물이 있다. 선화골쪽우물은 고려 충신 열사들이 즐겨 찾던 샘물로 ‘람정’이라 했다. ‘선화후과(先花後果)’란 딸을 먼저 얻고 아들을 얻는다는 뜻이다. 람정샘을 먹고 아들을 얻었기에 선화후과를 ‘선화골’이라 했단 얘기가 전해져 온다. 「강도지 람정난」에 이르기를 ‘물맛은 달고 시원하며, 가뭄에도 샘이 줄지 않고 솟아나며, 사시사철 샘을 찾는 이들이 모여들며 최근까지도 기우제, 산신제 등 지성을 드리는 정화수로 이용하는 이들이 있다’고 했다.
남산마을의 ‘마근대미고개’도 유명하다. 남문 밖과 부조고개 사이 마을에 있는 고개인 마근대미고개는 지금의 검문소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역병이 발생하거나 강화산성 안에 주요 행사가 있을 경우 우선적으로 차단하거나 통제의 역할을 하던 고개였다.
이처럼 남산마을은 화문석, 방직산업 등으로 강화 지역경제를 이끌었으나 산업구조 변화로 젊은 층이 빠져나가면서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세월이 지날수록 주거환경은 더욱 열악해져 빈집은 계속 늘어 마을의 영화(榮華)는 점점 사라져 갔다. 역사의 얼이 숨 쉬고 있는 마을임에도 강화읍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를 받으면서 마을 주민들의 상실감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비록 ‘도시재생’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사업에 대한 주민들의 기대는 대도시 도시재생 못지않은 큰 반향을 일으킬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남산마을 마을가꾸기 사업’이 섬마을 강화의 핵심 사업으로 시골 도시화 롤모델로 이어져 다시 한 번 주민들이 후덕한 마음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마을로 부흥하길 기대해 본다.
최유탁 기자 cyt@kihoilbo.co.kr
김혁호 기자 kimhho2@kihoilbo.co.kr
사진=강화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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