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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연 인천문인협회 회장
고희를 넘긴 박범수 수필가가 지난 10여 년간 모아둔 수필을 책으로 엮었다. ‘난시’는 언뜻 시력을 의미하는 줄 알았는데 마닐라 S골프장에서 근무하는 40대 필리핀 여성 캐디의 이름이었다. 그녀와의 인연은 오래된 모임에서 떠난 골프 여행에서 시작됐다. 골프가 서투를수록 이리저리로 튀는 공을 줍는 캐디는 고생을 하게 마련이다. ‘난시’는 내일도 운동을 하냐고 물으며 캐디를 교체하고 싶으면 미리 이야기하라고 한다. 작가는 자신이 공을 못 쳐서 기피하는 줄 알았는데 반대로 ‘난시’는 말없이 공만 치는 작가가 나이 많은 자신을 싫어하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제야 ‘난시’를 유심히 살펴보니 작은 키에 까맣게 탄 얼굴에서 먼 옛날 어머니의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작가가 10대 시절, 교직원 노동조합의 부회장이었던 아버지는 5·16 쿠데타 직후 좌경으로 몰려 구속되고 직장을 잃게 돼 사모님 소리를 듣던 어머니가 시장의 노점에서 채소 파는 일을 해야 했다. 작가는 신문을 돌리고 오는 저녁나절에 시장 모퉁이에서 기다렸다가 짐을 싸는 어머니를 도왔다.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두꺼운 마분지로 신문 뭉치를 둘러쌌는데도 작가의 옷에 밴 검은 잉크를 지우기 위해 늦은 밤중에 힘든 빨래질을 했다. 해방 후 북한의 급진적인 변화가 두려워 일가친척도 없는 척박한 남한 땅으로 내려와 온갖 고생을 했던 작가의 어머니나 자식을 위해 필리핀을 떠나 마닐라의 골프장을 누비는 ‘난시’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시’에게서 당시의 어머니를 떠올린 작가는 한동안 잊었던 모성애를 다시 느꼈는지도 모른다. 작가의 따듯한 관심에 마음의 벽을 허문 ‘난시’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자식들의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들려줬다. 헤어지는 날 작가는 그녀의 손을 잡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갖고 간 볼펜을 줬고 ‘난시’는 미소를 띠며 주머니에서 필리핀 사탕을 꺼내 작가의 손에 쥐어 줬다. 몇 년 후 작가는 모임의 총무로부터 골프 여행을 제안 받았는데 전에 갔던 일정에 S골프장이 포함돼 있었다. ‘난시’가 아직 그곳에 근무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작가는 여행에 동참키로 한다. 작가와 재회를 한 ‘난시’는 날이 더워 며칠 동안 손님이 없어 그냥 돌아가곤 했는데 자신을 지정한 한국인 손님이 있다는 말을 듣고 궁금해 어제는 잠을 설쳤다고 털어 놓았다. 세월의 강물이 흐른 흔적은 헛되지 않아 그녀의 아들은 직장을 잡고 딸은 대학에 들어갔다고 했다. ‘난시’에게 축하의 선물을 전하며 작가는 흘러가는 인연이지만 만남의 순간마다 성실하게 임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작가가 40대인 ‘난시’를 거부하고 20대 젊은 캐디로 교체하는 한낱 남성이었다면 아마도 나는 중간에 책장을 덮었을 것이다. 국경을 초월한 사람 냄새 나는 작가의 진솔한 인간미는 독자를 책 속의 바다로 빨아들이는 마력이 있었다. 정의감에 불타면서도 자상한 작가의 인간성은 「10불의 논쟁」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마끼모토 관광 도중 차량 접촉사고로 곤삐라 신사 관광을 못한 여행객들은 온천에서 숙박한 후 값비싼 진주제품 흥정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가이드 김 양은 자신이 실수해 하루치의 팁을 적게 거둬 100불을 변상하게 생겼다고 애를 태우며 작가에게 구원을 청했다. 작가는 1인당 10불이니 별 부담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강남에 살며 건설회사를 경영한다는 사장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한번 걷었으면 그만이라고 냉정히 등을 돌린다. 쓸데없이 남의 일에 개입하지 말라는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번에는 큰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는 의사에게 상의를 했다. 의사는 관광이 들어있지 않은 마지막 날까지 팁을 걷는 것은 잘못이라며 솔로몬의 판결을 내리듯 냉철한 선을 그었다. 작가는 가이드 김 양에게 자기 몫의 팁을 건네주며 다음날 일행들 앞에서 문제를 제기해 줄 테니 성실하게 안내하지 못했던 점을 사과하며 난처한 자신의 입장을 호소하라고 조언한다.

 인천문인협회에서 이사로 나와 함께 활동했던 작가는 넓은 오지랖으로 집행부에 입바른 소리를 자주 하곤 했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어린 시절부터 역경을 헤쳐 온 외유내강의 성격이 윤리적이고 감성적인 수필집을 탄생시키지 않았나 싶다. 책을 읽는 목적은 미사여구의 문장에 현혹되려 함이 아니라 작가의 인간성에 동화되고픈 갈망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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