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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순휘 정치학박사
한국전쟁은 단편 드라마가 아니라 장편 드라마이기 때문에 전투의 국면을 단편적으로 설명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파로호(破虜湖)’를 단순히 한자(漢字)조합적 해석으로는 절대로 불가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전쟁사적 ·역사적 차원에서 사실(fact)을 가지고 재론해야 한다. ‘한자조합적 해석’이라는 것은 ‘파로호’의 한자적 의미가 ‘파(破): 깨뜨릴 파’와 ‘로(虜): 오랑캐 로’ 그리고 ‘호(湖): 호수 호’가 결합된 명칭으로 ‘중공군을 상대로 싸워서 크게 격파한 호수’라는 의미로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이 하사한 전승휘호였던 것이다. 당시 용문산전투(1951년 5월17~28일)는 경기 양평군과 강원 화천군 일대에서 국군 제6사단(2, 7, 19연대+5개 포병대대)과 중공군 제63군(187, 188, 189사단) 사이에 벌어진 12일간의 전투로 국군 제6사단이 대승을 거뒀다.

 개전 현황을 요약하면 제6사단장 장도영 장군은 용문산 정상(1157고지)일대를 주저항선으로 7연대와 9연대를 배치하고, 중공군이 북한강을 도하해 올 것으로 판단, 제2연대를 전진 배치해 427고지를 전초기지로 방어전투를 대비했다. 국군 제6사단은 1951년 4월 제4차 중공군의 춘계 공세에서 당했던 사창리전투(1951년 4월20~25일)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절치부심하던 중 마침내 중공군 제63군과 격돌하게 된 것이다. 전 부대원이 결사(決死)라는 머리띠를 두르고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투지를 보여준 국군의 모습이 사진에 남아 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식 공격이 시작되자 제6사단은 국군 2개 포병대대와 미군 5개 포병대대의 화력 지원과 항공 전력 지원에 힘입어 중공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5월 19일 중공군은 전초부대인 2연대를 주방어선으로 오판하고 187, 188, 189사단을 전부 투입했다. 이런 적의 오판을 정확하게 판단한 6사단장은 주방어진지에 있었던 7연대와 19연대를 427고지로 야간 공격에 투입하자 중공군은 국군에게 포위당한 줄 착각해 패주했고, 2개 연대의 공세에 3개 사단이 무너진 꼴이 됐다.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아 중공군을 추격했고, 북한강에 막혀 퇴로가 차단당하면서 화천저수지 방면으로 80㎞가량 도주하던 중 끝내 화천저수지에서 궤멸당했다. 중공군의 입장에서는 약 3만 명을 투입해 제5차 춘계공세를 했지만 사망 1만7천여 명, 포로 2천 명의 대패를 당했고, 6사단은 사망 107명, 부상 494명 등 단일전투 최대의 대승을 거둔 전투로, 한국전쟁의 흐름을 바꾼 전투로 일명 ‘파로호전투’라고도 한다.

 최근에 불거진 ‘파로호’ 개칭에 대해 그 배경적 사유가 주중대사를 역임한 청와대 비서실장이 귀국해 거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국의 대사라는 사람이 자국의 주권침해적 요구를 듣고 단호하게 그 부당함과 궤변을 지적하고 반박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숙제를 받아온 학생마냥 사대외교(事大外交)적 언행을 하는 모습은 매우 유감스럽다. 한마디로 현대판 사대국치(事大國恥)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는 일이 2019년에 발생한 것이다. 혹여 중국이 과거 한국전쟁 당시 저지른 침략의 과오를 정식으로 사과한다던가 아니면 국가문서로 한국민에게 저지른 만행을 사죄라도 선행한다면 모를까 중국에서 파로호 명칭이 수치스러우니 개칭해 달라는 개인적 겁박은 고려할 가치조차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 맞다.

 역사적 명칭은 개칭한다고 수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개칭이 다시 역사가 돼 결국은 역사적 조롱거리가 된다는 것을 역사는 가르치고 있다. 인조시대에 청태종에게 ‘3배 9고두’의 굴욕을 당했던 삼전도비를 우리는 간직하고 있다. 이것을 부수고 없앤다고 그 치욕의 역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 역사를 반추하면서 미래의 역사를 고민하는 것이 아닌가? 중국의 그런 헛소리는 동북아의 패권국으로서 농반진반(弄半眞半) 한국의 대중반응을 떠보느라 한 짓거리로 일축할 필요가 있다. 이런 식으로 중국에 길들여지면 "살수대첩(612년) 지워라", "안시성싸움(645년) 없던 것으로 해라"식으로 계속 나올 것이다.

 사실 우리도 역사에 불편한 게 어디 한두 가지인가? 대한민국의 심장에 흐르는 강이 ‘한강(韓江)’이 아니라 ‘한강(漢江)’으로 고대의 한사군(漢四郡)의 지배 흔적이지만 받아들이며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 간섭에 호들갑을 떨면서 파로호를 일제강점기의 대붕호(大鵬湖)로 바꾸자는 식으로 거론되는 지방권력의 농단은 역사의 수치가 될 것이다. 오랑캐라는 말은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는 중국이 주변국을 우습게 알던 표현으로 그 역사의 서러움을 되돌려준 ‘파로호’는 위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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