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 모퉁이의 녹슨 철로 / 기차가 다니는 철길처럼 / 속살끼리 부비며 / 달밤에도 빛나고 싶건만 / 그렇게 소멸되고 싶건만 / 버려진 철로는 바람과 비와 눈을 / 적막을 견딜 수 없어 / 소리 없이 제 몸 찔러가며 / 검붉게 사위어가고 있다 / 취한 듯 스러지고 있다" 시인 설태수는 한때 중앙선의 간이역이었으나 지금은 폐역이 된 구둔역을 이렇게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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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석(코레일 양평관리역장)
 비록 지금은 기차역으로서의 오랜 소임을 다하고 현역에서 물러났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구둔역에서 많은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구둔역길 3’. 일제강점기인 1940년 4월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해서 2012년 중앙선 복선전철화 사업으로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폐역이 된 이후 아름다운 역사(驛舍)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구둔역이 있는 구둔 마을은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구둔(九屯)’이라는 이름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9개의 진지를 마을 산에 설치한 것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이곳은 전란 때마다 격전의 현장이었으며, 한국전쟁 당시 마을이 폐허가 됐을 때도 구둔역만은 허물지 않고 남았다고 전해진다.

 좁은 대합실엔 삶의 편린이 서린 낡은 의자와 매표창구, 벽에 걸린 열차시간표·운임표는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역 마당엔 기다란 나무 벤치와 방문객이 소원을 비는 수령 500년 된 향나무 외에도 오래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는 조용한 역사와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철길은 일부만 남아 있고 녹슨 철길 위에는 두 량의 열차가 멈춰 서 있다. 소박한 역사 지붕위로 봄 햇살이 따사롭게 내려앉는다.

 소중한 유산으로 남은 구둔역이 지금은 옛 추억을 더듬으며 여행하는 하나의 관문으로,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의 외관을 지닌 그리움의 공간이 됐다.

 옛 향수를 다소곳이 간직한 이곳은 또한 여행자가 지친 몸을 벤치에 걸치고 쏟아지는 졸음을 받아주는 고즈넉한 공간이기도 하다.

 현대사회를 ‘피로사회’로 규정한 지도 꽤 오래다.

 우리는 누구에겐가 쫓기듯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참된 안식과 평안은 잊은 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빠름’만을 추구하는 삶 속에서 잠시만의 여유조차 느낄 틈 없이 살아가고 있다.

 빠름과 높은 생산성을 강요하는 무한경쟁 사회에서 벗어나 자연과 인간, 환경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삶은 우리 내면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속도는 기계의 시간이며, 느림은 자연의 시간’이라는 표현은 피로사회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공감을 자아낸다.

 우리가 그토록 치열하게 추구하고 있는 물질적인 풍요나 문명의 편리함에서 잠시 떠나 자연에 순응하며 느림과 여유를 느끼며 살고픈 마음은 비단 나만일까?

 때론 여행을 통해 천천히 걸으며 느긋하게 사색하고, 나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면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것은 재충전과 활력을 찾기 위해 더없이 좋은 방법이리라.

 끝없는 속도경쟁 속에서 잠시지만 쉼과 휴식을 필요로 하는 우리에게 ‘아날로그적 감성’을 선사해주는 구둔역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지 않을까.

 소소한 추억 속으로의 여행을 원한다면, 옛 역사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여행자의 쉼터가 된 구둔역 아니면 이름 모를 간이역을 흔쾌히 추천하리라.

 먼 곳에서 찾아오는 여행자에게 ‘느림의 미학’을 느끼고 마음의 안식처가 되는 그런 공간으로 우리 곁에 오래도록 남아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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