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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불은 인류의 생활에서 주요한 수단이 돼 왔고 이의 사용은 원시시대의 인류를 다른 영장류로부터 구별하게 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성냥과 같이 필요시 언제든지 사용하기 위해서는 19세기 중엽까지 기다려야 했다. 전근대에 있어 불의 생성은 불을 새로 지피는 것과 똑같이 불씨를 지키는 것도 한층 중요시됐다. 우천에 상관없는 ‘성냥불 켜기’는 여러 차례 부싯돌을 긋고 부싯깃에 불이 붙어 연기가 나면 입바람을 불어서 불씨를 살리는 기존의 불붙이기에 비해 가히 혁명적인 방식이었다.

 성냥은 고대 그리스어의 불타는 도화선이라는 뜻의 매치(match)로서 총과 대포를 점화하는데 사용됐는데, 우리는 석류황(石硫黃), 다황(唐黃), 서양 부싯돌이라는 뜻의 양수화통(洋燧火筒)과 양취등(洋吹燈), 스스로 불을 일으킨다는 뜻의 자기석황(自起石黃)과 자래화(自來火), 빛을 부르는 노예라는 인광노(引光奴) 등으로 불렀다. 일본은 인촌(燐寸), 중국은 화시(火柴)로 표기했다. 성냥이라는 용어는 단단한 돌 형태의 유황인 ‘석류황(石硫黃)’에서 유래했다 하기도 하고 서양에서 들어온 유황이라 해서 ‘서양유황’이 성냥이 됐다는 설도 있다. 서양의 성냥이 개발돼 보급된 이후, 일본은 1875년 성냥공장을 설립했다.

조선에서도 발화 도구가 한층 개량된 것은 개항을 전후해서 나타나고 있다. 1876년 2월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전권대신 신헌은 일본이 예물로 바친 회선포(回旋砲, 개틀링포)의 뇌관을 점화할 때 사용한 것이 ‘양취등’이라 했고, 이미 천하가 다 쓰고 있는데 우리나라에만 없다고 고종에게 보고하고 있다. 이해 8월 무위소(武衛所)는 이를 바탕으로 군기(軍器) 중에 새로 ‘자기황’을 제조했다. 현재의 성냥과 유사한 것이 군수용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1880년 개화기 승려 이동인이 일본에서 석유와 램프, 성냥을 가져와 소개했다.

 세창양행은 1886년 2월 22일자 ‘한성주보’에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광고인 ‘덕상 세창양행고백’을 게재하면서 외국에서 수입한 자명종, 유리, 각종 램프, 서양 바늘 등과 함께 ‘자래화’(성냥)를 판매한다고 광고했다. 세창양행이 1884년 6월에 설립한 것을 감안하면 성냥은 인천 개항 이후 일본 상인과 독일무역상사 세창양행과 같은 구미무역 상사에 의해 수입 판매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격이야 비쌌겠지만 발화와 휴대가 용이하다는 편리성 때문에 점차 사회전반으로 소비열풍이 확산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성냥 공장이 최초로 세워진 지역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먼저 1900년 러시아 대장성이 발행한 「조선에 관한 기록」은 1886년 외국인이 제물포에 성냥공장을 세웠다 했고, 1933년에 발행한 「인천부사(仁川府史)」는 외국인과 일본인이 합자해서 1885년께 서울 양화진에 성냥공장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도 단편적 기록들이 있으나 내용을 실증하기에는 미흡한 실정이다. 여기에 ‘제국신문’ 1899년 4월 21일자에는 서울 사동 충훈부 건너 고흥사(고興社)에서 ‘최초’로 성냥을 제조해 판매하고 있음을 광고하고 있다. 장정 30~40명, 어린이 50~60명을 고용한 대규모 회사였다는데 이후의 진척 과정을 확인할 수가 없다.

 성냥산업은 주로 수공업에 의존하는 노동 집약적이었으므로 조선처럼 임금이 저렴한 지역에서는 대단히 유리한 사업이었다. 따라서 성냥산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됐기 때문에 의외로 많은 성냥공장이 부침을 계속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은 우리 개항장에 진출해 있던 유럽계 무역상사들을 개점 휴업케 했고, 일본 상인들은 이를 사업 확장 기회로 적극 활용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성냥 제조와 판매를 목적으로 1917년 인천 금곡동에 세운 조선인촌(燐寸)제조주식회사였다.

대규모 자본이 투입돼 본격적인 공장제 생산이 이뤄진 ‘최초’의 공장으로 성냥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성냥하면 인천을 떠올리는 계기였기도 하지만, 근대문물 수용이라는 추세를 반영하면서 자연스레 경제적 착취와 수탈을 자행했던 현장이었다. 당시 조선인에게 성냥공장 설립을 불허하고 제조 기술마저 전수하지 못하도록 강제했음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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