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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계에서 그룹 방탄소년단이 삶을 위로하는 메시지로 전 세계 주류음악 시장의 관심을 받고 있다면, 영화계에서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 영화제의 최고 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그 어느 때보다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국 영화 100주년을 맞아 이룩한 뜻깊은 이번 수상에 대해 봉준호 감독은 "제가 어느 날 갑자기 한국에서 혼자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 김기영처럼 많은 위대한 감독들이 있다"고 소감을 전했다. 대중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봉준호 감독을 비롯한 박찬욱·김지운·임상수 등 여러 영화인들이 존경을 표하는 김기영 감독은 독창적인 스타일로 인간군상의 검은 욕망을 탐구한 작가적 감독이다. 그의 1972년 작 ‘충녀’는 ‘기생충’의 레퍼런스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아버지를 갑작스레 잃은 명자는 네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호스티스로 전락한다. 한편, 사업가였던 동식은 자신보다 수완과 능력이 월등한 아내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한량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패배감과 열등의식에 젖어 주눅들어 지내던 동식은 어린 명자를 만나 편안함을 느낀다. 두 사람은 가정을 차리고 싶지만 동식은 경제력을 쥐고 있는 본처의 영향력을 벗어나 살아갈 의지가 없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아내는 남편의 외도를 허락한다. 대신 12시간씩 남편을 공유한다는 기이한 조건을 내건다. 정오부터 자정까지는 명자가, 자정부터 다음 날 정오 전까지는 아내와 살아야 하는 이들의 기막힌 공생은 그러나 각자의 욕망이 상충하며 결국엔 파국으로 마무리된다.

 영화 ‘충녀’는 ‘화녀’, ‘화녀82’로 이어지는 김기영 감독의 여자 시리즈 중 하나로, 모티브는 1960년 작 ‘하녀’의 기본 서사인 중산층 집안에 노동자 계급의 낯선 사람이 들어와 충돌하고 대립하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영화 ‘충녀’는 1970년대 작품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파격적인 설정을 보여 주는데, 당시 군사적 남성성이 강조됐던 시대에 당당함과는 거리가 먼 무기력하고 도피적인 남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반면 그의 아내는 강인하고 노동에도 적극적으로 종사해 경제력을 획득한 인물이다. 그러나 이 여성은 탄탄하게 구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가정과 회사의 모든 통제권을 장악한다. 심지어 남편의 첩인 명자에게도 월급을 줘 굴종시킨다. 이처럼 영화는 전복된 성 역할을 통해 고정관념과 편협한 인식에 일침을 가하며 자본주의가 낳은 새로운 계급 간의 갈등, 더 나아가 황금만능주의에 젖은 인간군상의 비극을 폭로하고 있다.

 영화 ‘충녀’의 충(蟲)은 벌레나 회충을 의미한다. 영화 ‘기생충’에 영감을 준 작품인 만큼 메시지나 스타일적 교집합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토양 없이 절로 탄생하는 것은 없다. 한국 영화 100년의 역사 위에 황금종려상의 영광이 있다. 이 시점을 계기로 클래식 한국 영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그에 맞게 접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아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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