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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개성 찾아주는 꼼꼼한 이발 솜씨… 유쾌한 입담은 ‘덤’

강화군 ‘중앙이발관’

김유리 기자 kyr@kihoilbo.co.kr 2019년 06월 14일 금요일 제15면
▲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중앙이발관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발관을 운영하는 공제창, 공제관 형제가 손님의 머리를 자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입구에 늘어진 블라인드를 걷고 손님들이 들어온다.

 인천시 강화군 중앙이발관 안의 공제창(64), 공제관(49) 이발사는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살갑게 맞이한다. 뒤늦게 줄지어 오는 손님들은 신문을 집어 들고 소파에 앉아 차례를 기다린다. 단골손님들로 가득찬 이발소는 금세 서로의 안부를 묻고 농담을 나누며 시끌벅적해진다.

 공제창 이발사는 손님에게 가운을 입힌 뒤 서늘한 가위질을 한다. 목덜미와 귀 언저리까지 꼼꼼하게 다듬는다. 벌써 40년째 단골이라는 손님은 "여기는 머리를 너무 조금씩 잘라줘. 한 번에 팍팍 깎아야 가끔 오는데 조금씩 자르니까 자주 와야 하고 성가시다니까"라며 짓궂은 농담을 던진다.

 "자주 보면 좋죠 뭘 그래요"라고 공 이발사가 답한다. 단골손님들의 농담을 받아치는 재치있는 입담은 이발사들에게 필수다.

단골손님은 40년째 중앙이발관을 찾는 이유를 이웃 같은 친절함과 꼼꼼한 이발 솜씨로 꼽는다.

 손님은 "이 이발소는 단순히 머리만 깎는 곳이 아니라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공간인거지. 이곳에 오면 이웃 주민들의 소식부터 정치 이야기까지 온갖 소식을 다 들을 수 있어. 오래된 단골들끼리는 여기서 하도 자주 보니까 서로 얼굴도 다 알아. 나는 친구를 만나러 오는 기분으로 항상 여기만 와"라고 했다.


 강화 중앙이발관은 같은 자리에서 2대째 대를 이어 영업 중이다. 1대 창업주인 공인섭 사장은 북한 개성에서 이발기술을 배우고 한국전쟁 때 피란을 내려왔다. 그 후 인천 동구 배다리마을 등 이곳 저곳을 전전하며 이발사로 일을 하다 강화에 정착하면서 1962년 중앙이발관을 창업했다. 처음에는 현재 강화중앙시장이 있는 위 도로에 있었지만 2차선으로 확장하면서 건물이 헐려 나가 장사를 중단했다.

 현재 가게를 이어가고 있는 아들 공제창 사장은 장사가 잘 되던 시절 부족한 일손을 채우기 위해 이발관으로 투입됐다. 1978년 군대를 제대하며 이발면허를 취득하고 1979년 아버지와 함께 다시 한 번 이발소를 열었다.

▲ 인천시 강화군 중앙이발관 전경.
 중앙이발관이 한창 전성기를 누리던 1960∼70년대는 면도 의자만 5개를 갖추고 4∼5명의 직원이 함께 일할 정도였다. 하루 방문하는 손님들은 20명이 넘었다. 직원들은 머리를 감겨주는 세발사, 드라이 손질을 해주는 시야기, 이발사, 여성 면도사로 역할이 분담됐다. 지금처럼 전자동 바리캉이 없던 시절은 일일이 손으로 깎느라 손님 한 분을 맞이하는데 40∼50분씩 걸리기도 했다.

 공제창 사장은 막내 세발사부터 시작했다. 가게를 열기 전 새벽에 출근해 가위와 면도칼을 갈고, 청소를 하는 일도 막내 담당이다. 손님들의 머리를 감겨주며 어깨너머로 기술을 배워 이발사까지 올라가기까지는 최소 7년에서 최대 10년까지도 걸린다.

 장사가 가장 잘되던 1960년대 서울 한남동의 이발비는 600원, 당시 시골이었던 인천 강화도는 절반 수준인 200∼300원이다. 직원들의 임금은 하루 매출에 따라 일당으로 지급돼 많은 날에는 일당이 몇 천 원에 달하던 때도 있었다.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사람들이 이발기술을 배우면 생계 걱정을 한시름 덜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현재 중앙이발관을 찾는 손님들은 대략 10명 남짓이다. 이마저도 옛날부터 찾아준 단골손님 위주다.

 공제창 사장은 1990년대 퇴폐 업소 등장으로 중앙이발관 매출이 줄어들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과거 여성 면도사를 따로 두는 이발소가 인기를 끌던 시절이 지나고 퇴폐 이발소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것이다.

▲ 중앙이발관 공제창 사장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발관을 운영하면서 느낀 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남성의 멋 내기 공간이었던 이발소의 이미지가 타격을 입으며 반대로 모범 이발관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1970년대 10여만 명을 넘는 강화 인구가 90년대 5만여 명으로 줄어들고, 1980년대 두발 자유화로 미용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손님을 뺏긴 것도 매출 하락의 원인 중 하나다.

 이런 가운데 남성 이발소는 다시 이미지 변화를 겪고 있다. 최근 바버숍 등 고품격 서비스를 제공하는 남성 미용공간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변화가 있기까지 면도와 마사지 등 서비스로 수십 년 단골을 거느릴 수 있는 힘은 기술에 대한 자신감에서 나온다.

 공제창 이발사는 "다양한 스타일을 시도하는 것도 좋지만 사람들은 두상이나 가마 방향에 따라 머릿결, 머리 빗는 방법 모두 다르잖아요. 그 손님만의 맞춤 스타일을 찾아주는 것은 우리 중앙이발소의 역할이에요"라고 말했다.

 이에 더해 "애기 엄마들은 일부러 어린 아이들을 데려오는 경우도 있어요. 우리 이발소는 면도칼을 일회용으로 일일이 바꾸면서 쓰니까 위생적이라며 믿고 맡기는 겁니다"라며 "면도나 마사지 서비스도 미용실에서는 받기 힘들잖아요. 면도할 때 개운함을 선호하는 손님들은 여기만 와요"라고 덧붙였다.

 중앙이발관의 단골은 3대가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1대 사장인 공인섭 이발사의 단골이었던 손님의 아들과 손자까지 찾아온다. 학생 손님까지 사로잡은 데는 동생 공제관 이발사의 공이 크다. 평소 세미나를 다니고 기술개발을 하며 미용과 이용의 격차를 줄이는데 힘을 쓴다.

 공제창 이발사는 "요즘 사람들은 옛날이랑 다르게 기장도 좀 더 긴 스타일을 좋아하고, 학생들은 옛날 상고머리보다는 투 블록을 좋아해요. 그런 최신 유행하는 스타일을 이발소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동생은 최신 기술과 젊은 세대 취향을 많이 배우려 다녀요"라고 했다.

▲ 중앙이발관 공인섭 1대 사장이 쓰던 이발도구.
 중앙이발관은 형제가 함께 운영한다는 점에서도 이목을 끈다. 오래된 단골손님은 형이, 학생과 젊은 청년은 동생이 주로 담당한다. 형제 간의 우애는 단골손님들 사이에서도 호평을 얻는다.

 공제창 이발사는 "형제가 함께 있기에 서로 의지가 돼서 좋습니다. 경영부문에 대해서 항상 의견을 나누고 서로의 머리를 깎아주기도 해요. 지금 제 머리도 동생의 솜씨예요. 강화뿐만 아니라 전국 어디에서도 우리 형제처럼 재미 있게 일하는 집은 없을 거라고 봐요"라고 자랑 한다.

 중앙이발관의 공제창, 공제관 이발사는 수족이 움직이는 한 가게를 계속 운영 해 나갈 계획이다. 한때 아들에게 가게를 물려줄 생각도 했지만 다른 진로를 찾는 아들의 선택을 응원하기로 했다.

 공제창 이발사는 "퇴직하고 나서 소일거리를 못 찾는 친구들에 비하면 계속해서 이발소를 운영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도 느껴집니다. 여태 하던 대로 손님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도서 지역이나 요양원에 방문해서 이발을 해주는 봉사도 하며 계속 이 기술을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싶다"며 소박한 포부를 밝혔다.

   김유리 기자 kyr@kihoilbo.co.kr

사진=  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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