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jpg
▲ 전재학 제물포고 교감
오늘날,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모든 것을 경쟁(競爭)의 논리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미국을 위주로 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신자유주의 정책시스템은 그 기저에 극심한 경쟁논리를 내세워 정치, 사회, 문화, 교육의 제반 영역까지도 지배한다. 사람들은 이에 희생돼 삭막하고 끔찍한 삶을 살아간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수많은 희생자를 양산하게 될 경쟁은 이른바 ‘폭력사회’ 내지 ‘야만사회’의 주범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도 경쟁은 이미 ‘국시(國是): national policy’가 돼 버렸다. 이제 한국에선 열등감이 없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끝없는 경쟁의 수직적 위계 속에서 언제나 누군가가 나보다 위에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망국의 근원이라는 사교육도 결국 타인에게 뒤지지 않기 위한 경쟁의 논리가 압도적이다. 타인보다 탁월함, 유능함을 발휘해 자기 만족을 얻으려는 서구사회의 교육적 접근과는 달리 애초부터 타인보다 앞서려는 우리의 경쟁의식은 종국적으로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기에 서구와 우리의 사교육은 근본적으로 개념 자체가 다르다.

 오래 전에 유럽의 한 인류학자가 남아프리카 반투족 지역에서 한 가지 실험을 했다. 그곳 아이들을 몇 명 모아놓고 그들이 얼마나 경쟁심이 있나 알아보고자 했다. 우선 인류학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일을 한 바구니 준비해서 저만큼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고 이쪽에서 아이들이 뛰어가 제일 먼저 과일 바구니를 터치하는 사람에게 과일 전부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일반적인 경쟁의 속성- 다투어 뛰어가서 제일 먼저 과일바구니에 손을 댈 거라는 관념- 과는 달리 뛰어가라는 신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답게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가서 과일 바구니에 모두가 동시에 손을 대고 주변에 둘러앉아 화기롭게 과일을 나눠 먹었다. 그러한 행동의 이유를 묻는 실험자의 질문에 아이들은 ‘우분투’라고 입을 모아 복창했다. 그 뜻은 ‘우리가 함께 있어 내가 있다’라는 것이다. 이는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강조했던 말로도 유명하다. 그렇다. 그들에게는 우리와 함께 나이고, 너와 함께 나이고, 나와 함께 너인 것이다.

 또 다른 사례를 보자. 오늘날 독일교육의 초석을 놓은 1970년대 교육개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경쟁에서 야만의 징후를 주시했다. "경쟁은 근본적으로 인간적인 교육에 반하는 원리"로서 "인간적인 형태로 이뤄지는 교육은 결코 경쟁 본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는 경쟁을 "의심의 여지없는 야만"이라고 힐난했다. 경쟁에 반대하는 아도르노의 교육이념이 실현됨에 따라서 독일의 학교에서는 경쟁은 야만 행위로서 경계의 대상이 됐고, 우열을 가리는 석차는 사라졌다. 학생은 서로 다른 취향과 재능을 지닌 개성적 존재이지, 우열을 나눠 일렬로 세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독일인에게 부러운 사실은 어떤 일에 종사하든 모두가 당당하다는 것이다. 우리 눈에 비치는 많은 독일인에게서 열등감을 가진 이를 찾기가 힘든 이유이다.

 이제 세상은 타인을 챙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에 와 있다. 타인이 잘되는 길이 내가 잘되는 길이고 타인과 함께 하는 삶이 좋은 삶이고 현명한 삶이라는 진리를 깨우쳐 주고 있다. 교육혁명은 경쟁교육의 완화에서 출발해야 한다. 인간이 자신의 재능, 잠재력을 발현(發現)시키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육이다. 모든 인간을 획일화된 기준에 맞춰 줄 세우고, 수직적 위계질서에 배치하는 가혹한 경쟁교육이 초래하는 야만의 시대를 끝내야 어린 학생들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기지 않는다. 경쟁교육에서 공존교육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우리에게 ‘우분투’를 지향하는 교육을 기대한다는 것은 과연 언제나 가능할까?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