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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원일 인천부평으뜸포럼 대표

21세기 정치학대사전에서 한 국가는 영토, 국민(사람), 주권(정부)이 구비돼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 중 영토를 제1 요소로 삼고 있는데는 국민이 호흡하며 살아가는 공간을 확보하고, 파탄 국가가 아니라면 거기서 수립된 정부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만큼 국가의 영토는 영해(領海), 영공(領空)과 더불어 소중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6월의 마지막 날에 문재인 대통령과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비무장지대(DMZ) 내 오울렛 초소를 방문해 함께 북측을 바라보며 15분 동안 대화했다. 오울렛 초소는 한국전쟁 영웅 고(故) 조셉 오울렛 일병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조셉 일병은 한국전쟁 개전 초기인 1950년 8월 31일부터 9월 3일 까지 낙동강 방어선인 영산지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전사해 미 대통령이 의회 명의로 수여하는 ‘명예대훈장(Medal of Honor)’을 받았던 인물이다.

 결코 재발돼서는 안 될 전쟁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금년으로 69년이 됐다.

 우리 국군은 물론 어린 학도병까지 뜨거운 피를 흘리며 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침략 전쟁을 막기 위해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북남미 등 16개국에서 온 UN군은 평화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이역만리에서 귀중한 목숨을 아낌없이 바쳤다.

 한국전쟁 초반 북한에 점령당했던 서울에서 석 달간 인민군 치하에 있었던, 남한의 한 교수는 죽지 못해 살아남았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시민들이 조국에 대한 충성심이 이토록 불탄 적은 없었다. ‘인공국을 겪어 보고 뼈저리게 대한민국을 그리워합니다’라는 그의 일기장이 던지는 울림이 지금도 진동하고 있다.

 인해전술을 쓰는 중공군에 밀렸던 유엔군은 지평리 전투를 계기로 ‘인해전술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반격으로 돌아섰다. 프랑스의 랄프 몽클르라 중장은 중령으로 계급을 낮춰 코리아로 파병되는 대대급 부대를 지휘해 미 23연대와 함께 중공군의 대공세를 막았다. 제임스 매티스 사단장은 1950년 11월 장진호까지 올라갔다가 10배에 가까운 중공군에 포위됐지만, ‘질서 있는 퇴각’으로 그 유명한 흥남철수 작전을 가능하게 했다. 1951년 4월 맥아더 장군은 상하원 고별 연설에서 "한국군이 정말 장렬하게(magnificent) 잘 싸웠다"라고 증언했다. 그래서 지금 한미 동맹으로 두 나라가 단단히 결속하게 된 것 아닌가.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 끼이고 미국의 자국 보호 무역주의가 성큼 다가오는데, 대한민국은 각별한 노력과 냉철한 판단을 해야 우리 안보와 경제의 미래를 확보할 수가 있다. 판단은 개념과 직관의 작용이다. 개념은 열심히 연마한 노력의 산물이고, 직관은 개념이 고도화됐을 때 비로소 발휘된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발트3국 중 핀란드가 옛 소련과 벌였던 겨울전쟁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옛 소련은 발트3국을 합병했지만, 나란히 있던 핀란드는 끝내 건드리지 않았다. 핀란드는 러시아와 스웨덴 사이에 낀 소국이지만 1939년 10월 소련이 영토 일부의 양도를 요구했을 때 단호히 거절했다.

 이에 소련군 50만 명이 침략해 석 달 만에 무릎을 꿇게 했지만, 핀란드 스키 부대원들은 육탄으로 탱크에 뛰어 들어 소련이 치를 떨게 했다. 이후 소련은 핀란드의 유럽연합 가입조차 눈감아 주게 됐다.

 1979년 중국의 덩샤오핑이 조그만 나라 베트남에 쳐들어갔을 때 어떠했는가? 베트남은 국민 총동원령을 내리고 저항하자, 중국은 그 기세에 눌려 한 달 만에 철군했다. 붉은 장미처럼 생명의 열정이 만방에 꽃을 피운 6월도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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