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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락기 시조시인
개여울에 두 발을 담그고 앉는다. 곁에는 흐드러지게 핀 개망초꽃으로 온천지가 새하얗다. 청록 산뽕나무 그늘 아래 마파람이 땀 배인 옷섶을 파고든다. 무더위가 시작되는 소서 무렵에는 제철 과일 수박과 참외가 보양식이다. 밀짚모자를 눌러쓴 채, 짐실이 자전거 페달을 슬금슬금 밟으며 하오 느지막이 찾아온 개천은 한가하다.

조손과 모자 두 쌍이 여울 안 바위나 돌다리를 벗 삼아 노니는 모습이 자애롭다. 썰어온 과일 한 점을 입에 문다. 달차근한 맛이 혀에 닿기도 전에, 건너 편 둔치 물억새 사이 주저앉아 있는 장년이 클로즈업된다. 생각에 잠긴 얼굴 꼴이 심각하다. 풀포기가 돋아나던 때부터 날마다 이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별리의 회한과 재회에 젖은 모습이다.

그러길 또 한 세대도 넘어선 어느 날, 돌연 서그러운 여인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하루해는 막 저무는데 이 무슨 세레나데인가. 서럽고도 아리따운 만남. 그 후 지속된 두 사람 간의 ‘개여울 밀회’는 어언 반세기가 다 돼 가는데… 오늘 그만 이내 몸에 들키고 말았으니, 이 난감함을 어이할까.

가수 정미조가 70년대 초에 불러 히트한 노래 ‘개여울’의 가사를 빌려 어쭙잖게 이야기를 엮어봤다. 사실 이 노래는 1922년에 발표된 소월의 시였다.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 앉아서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기’에 요즘도 애창되는 불후의 명곡이 됐다. 개여울은 골짜기나 들에 흐르는 작으나마 물살이 센 곳을 이른다.

요새는 굳이 산골이나 들판이 아니더라도 동네 천변을 가면 된다. 시·군·구마다 개천을 잘 정비해 힐링 장소로 내놓았다. 여울목에 징검다리며 정자에 화단이며 자전거길에 산책 코스 따위는 기본이다. 잘 다듬어진 개여울이랄까. 무료하거나 답답할 때 자전거라도 타고 바로 근처 개천으로 가서 여울물에 발 담그고 앉아 본다.

우선 사람 대신 자연 속의 벗들을 만날 수 있어 새롭다. 피라미 떼가 반긴다. 팔뚝 만한 잉어는 물 밖으로 미끈한 등지느러미를 드러내며 유혹한다. 백로는 긴 목을 빼어든 채 상념에 젖고, 물병아리였던 청둥오리 가족은 이제 살이 통통히 올랐다. 진초록 갈대숲 물가에는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버들과 플라타너스 그늘이 제격이다. 천변에는 7월의 갖은 꽃들이 환영한다. 루드베키아나 기생초가 화단에 적황색으로 수놓은 것도 좋다. 보다 웅숭깊은 것은 산야에 절로 피는 꽃이다. 그 중에서도 ‘개’자가 들어가는 꽃들이 진득하다. 개양귀비, 개억새, 개망초의 ‘개’는 ‘야생 그대로’의 뜻일 게다.

절로 떼를 지어 피면서 검질기게 생명력을 발화하는 순백의 화신 ‘개망초꽃’은 어디서나 쉬이 볼 수 있다. 이른바 민초들의 꽃이다. 순수가 넘실거린다. 숫제 순백을 넘어 색깔조차 없다. 희망도 절망도 놓아버린 무망(無望)의 경지다. "무망도 꽃으로 필 수 있는가/온통 색깔 없는 색깔로 한들거리며/희망도 절망도 없이/그저 밀리고 쓸리며 지내온 것이/태반이 벙어리 냉가슴 앓이조차 못해본 여항인/그 무지렁이에게서 터져 나온 꽃대들/색깔 없는 꽃도 꽃이라고 거기 기웃거리는/범나비 두어 마리가 정녕 낯설어/장림 뒤 도린곁/짙푸르게 좍 깔린 잡풀 틈바구니에서야/무채색으로 남으려 남으려다 기진하여/지지리도 서러웁게 내보이는 하이얀 개화/무망이 피워 올린 꽃물결/개망초꽃들의 맺힌 억장 부서져 버림이여." 나의 자유시집 「고착의 자유이동」에 있는 졸음 ‘개망초꽃은 지지리도 하이얀 무망이다’의 전문이다.

부서져 다 놓아 버린 경지, 방하착이다. 이때 자아와 나누는 무욕의 대화는 편안하다. 거스를 게 없다. 객아를 살펴보면서 속 깊이 자아 그대로를 읽는다. 일전 우리나라 152개 기업 대상 직원 건강관리에 관한 어느 실태조사에 따르면 직장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가장 우려되는 것으로 나왔단다. 최근 스트레스 해소법으로 멍 때리기라는 게 관심을 끈다. 무망은 어쩌면 자아마저 비워버린 멍한 상태와 같다. 개여울에 발 담그고 앉아 멍하니 한 20분 있어본다. 삼림욕에 못지않은 효과가 날 수 있다. 스트레스는 온데간데없을 테다.

어느덧 개여울 물소리 따라 흘러온 마음의 고향이 사변을 감싸돈다. 자연 속의 벗들과 나는 하나가 되어 멍하니 무망에 든다. 복날은 다가오는데, 작년 같은 초열대야 속 온열환자가 더 나지 않기 바란다. 미리 여울물에 씻는다. 시조로 읊는다.

# 개여울

하고많은 연분들이
가뭇없이 맺어질 때

여울살에 씻기우며
허공처럼 비웠더니

늘 그리
싱그러운 물길
지혜로도 흐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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