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jpg
▲ 이재훈 겨레문화연구소 이사장

내 어릴 적 기억의 중심에는 외가(外家)가 있다. 방학이 시작되면 나는 으레 20리도 족히 넘을 신작로(新作路) 자갈길을 내달려 외가로 가곤 했다. 특히 여름철에는 방학 한 달 내내 외가에서 지냈다. 외할머니의 특별한 사랑 탓도 컸지만 가장 큰 이유는 뒷동산만 넘어서면 넓은 바다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는 정말 신나는 놀이터였다. 개헤엄 수준의 수영 실력이었던지라 나에게는 당연히 밀물 때보다는 물이 빠져나가 갯벌이 넓게 열렸을 때가 훨씬 놀기에 좋았다. 밀물 때나 썰물 때에도 어김없이 가장 먼저 물이 드나드는 물길 갯고랑에서는 동무들과 헤엄을 치거나 망둥이 낚시를 즐기곤 했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넓은 펄에서 노는 일은 더 신나는 일이었다. 마치 엎드려서 썰매를 타고 경사진 얼음길을 쏜살같이 내려오는 스켈레톤(skeleton)선수처럼 얼굴과 온몸에 개흙을 바르고 갯고랑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와 바닷물 속에 풍덩 빠져드는 재미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갯벌은 신나는 놀이터이기도 하지만 펄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면, 민챙이, 비단고둥, 짱뚱어, 칠게, 달랑게, 우렁이, 조개, 골뱅이는 물론 이름도 잘 알 수 없는 수많은 작은 생물들이 활동하는 모습들을 늘 볼 수 있었다. 갯벌 이곳저곳에는 마치 누군가 손가락으로 그린 듯한 흔적들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들 갯벌 생물들이 짝이나 먹이를 찾아 이동하거나 작은 미생물을 먹는 과정에서 남겨 놓은 흔적들이다.

 어른이 돼서야 알게 된 지식이지만 갯벌에는 약 720여 종류의 생물들이 각자 놀라운 생존 능력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갯벌은 육지와 바다를 이어 주는 완충지대여서 각종 어패류의 서식지와 산란장이 되기도 하며, 전체 어획량의 60% 이상이 생산되기도 하는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자연재해와 기후 조절 기능까지 있고, 갯벌만의 특이한 경관 때문에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도 매우 크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해변이기도 한 한반도의 서쪽 바다 황해 연안의 갯벌이 해안선의 출입이 심하고, 조차(潮差)가 매우 크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전체 갯벌 면적의 83%가 황해 연안 지역에 분포한다는 사실이나, 캐나다 동부해안, 미국의 동부 조지아 해안과 북해 연안, 남미 아마존유역과 더불어 세계의 5대 갯벌로 꼽힌다는 사실을 매립에만 열을 올리는 지자체들이 알고는 있을까?

 세계 5대 갯벌로 잘 알려진 우리나라 갯벌들이 보호되기는커녕 곳곳이 매립돼 신도시나 대규모 산업단지로 바뀌는 모습들을 보며 떠오른 의구심(疑懼心)이다.

 외가(外家) 뒷동산에 올라서면 볼 수 있었던 탁 트인 바다와 갯벌은 이젠 없고 새로 생긴 농토와 아직은 황량한 공단 예정지만 보인다. 그 많던 고깃배 한 척 볼 수 없고, 당연히 갯벌을 부지런히 기어 다니던 작은 게 한 마리도 볼 수 없게 됐다. 삼목도, 용유도 사이에 있던 4천628만여㎡의 영종 갯벌에는 인천공항이 들어섰고, 남동 갯벌도 대부분 매립돼 공단으로 변했다. 송도 갯벌 또한 1990년대부터 신도시 건설을 위해 매립되기 시작해 지금도 진행 중이다. 해양수산부가 5년 주기로 전국 갯벌 면적조사를 통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대략 여의도 면적의 1.79배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동아시아, 대양주 철새 이동 경로 파트너십(EAAFP)’의 밀링턴(Spike Millington) 사무국장은 최근 서울에서 열린 황해지역 갯벌 관련 세미나에 참석해서 황해갯벌이 사라진다면 이동성 철새도 멸종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모든 철새는 각기 다른 이동 경로를 갖고 있어서 황해갯벌과 철새가 사라진다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갯벌에 의존하던 이동성 물새도 멸종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 갯벌의 가치가 정부 차원에서 재조명되고 있으며 ‘깨끗한 바다, 풍요로운 어장’을 국정 과제로 정하고 정책 수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토 면적의 2.5%에 해당하는 데다가 산업 경제적 기능뿐만 아니라 해양생물의 보고이자 어업인의 생활터전이기도 한 우리나라 갯벌의 가치를 인식하고 대책에 나선 것으로 보여 다행이다.

 얼마 전에 방문했던 강화 동검도 인근 갯벌을 보고 놀랐다. 조개라도 주워볼까 들어간 갯벌은 발도 빠지지 않을 만큼 단단했고 기름을 발라놓은 듯 미끄러웠다. 생물체의 흔적은커녕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외부 영향에 민감한 갯벌이 무엇인가에 심하게 오염됐음이 분명해 보였다.

 강화 갯벌은 생태적 가치와 경관 등을 고려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갯벌 국립공원으로 지정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는 한 연구기관의 보고서 내용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