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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 소장
곧 제헌절이다. 1948년 7월 12일에 국회를 통과하고 5일 후인 17일에 공포돼 ‘헌법이 제정된 날’을 뜻하는 제헌절이 생겼다. 헌법은 나라의 기초를 설계한 문서로 이에 따라 우리나라의 초석이 마련되고 제시된 날이기에 제헌절은 대단히 중요한 날이다. 그러나 대통령 권력이나 의회 권력을 차지한 정치권은 제헌절은 물론이고 헌법까지 별로 중시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가 2008년 제헌절을 법정공휴일에서 배제한 것만 봐도 그렇다. 이것만이 아니다. 헌법은 각종 공무원 시험의 과목이었다가 제외되기도 했다. 공무원으로 행정 기술자를 뽑겠다는 것인가? 헌법을 지키며 헌법에 따르는 행정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일본의 경우 공무원 책상 위에 헌법 해설서가 반드시 있다고 하는데 그에 비하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밖엔 할 도리가 없다.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는 가장 강력한 그룹이 누군가? 혹자는 정치라고 말하고, 혹자는 재벌이라고 확신하고, 혹자는 검찰이라고 믿고 있고, 혹자는 관료집단이라고 단정하고, 혹자는 ‘밤의 대통령’이라고 의심한다. 과연 누굴까? 필자는 맨 꼭대기에 관료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관료들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은 정치에 매여 있다고 엄살(?)을 부릴 게 분명하다. 선거에서 당선된 이유 하나만으로 중요한 자리를 모조리 꿰차고 앉아 ‘나라를 이끈다’는 주체적 지각도 못하고 그렇다고 물러서지도 않으면서 권세와 명예와 부를 좇아 움직이는 걸 파워라고 여기는 상황에서 그렇게 말하는 걸 탓할 수는 없을 것이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관료들은 부서, 기관, 기수별로 분산돼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갖고 있는 힘의 실체를 실감하지 못할 수 있겠으나 실제로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권력 그룹의 힘은 그들이 가장 많이 갖고 있다. 문제는 그들이 헌법 정신에 충실하지도 않고, 나라를 이끈다는 전략적 자각이 약하다는 데 있다. 그저 국가에 고용된 직원의 마인드만 있는 것이다. 그동안 대한민국을 이끈 파워 그룹은 계속 변해왔다. 우리 세대가 한창 젊었을 때는 군이 꼭대기에 있었다. 반독재 투쟁이 가능했던 이유 가운데 가장 힘이 세고, 가장 나쁘고, 가장 많이 보는 인물이 동일한 인물이었기에 쉬웠다는 점과 투쟁의 목표와 이유가 분명할 수 있었기에 용기만 있으면 됐다.

 유신시대가 끝나고 3김의 전성시대에는 정치가 맨 꼭대기에 자리 잡았다. 이때는 오늘과 분명히 다른 점이 많았다. 3김 시대는 합목적적 유연함이 있었다. 그들은 연합하고 정치를 즐길 줄 알았다. 헌법 정신이 대접 받을 수 있었던 배경이다. 물론 정치를 ‘업’으로 했기에 명분상 그랬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들은 국민들에게 꿈과 비전을 제시하고 동지를 모으고 당을 만들고 지속적으로 국민의 시선을 받고자 했다. 그 결과 지지자들로부터 욕을 먹기도 했고, 반대파는 끌어안으려는 노력도 있었다. 이 시절에 무섭게 힘을 갖게 된 것이 법조 그룹이다. 검찰·대법원·헌법재판소·로펌을 망라한 법조는 때로 민주적 통제를 벗어나 오만한 권세의 신탁에 자리 잡았다. 원래 법치의 먹이사슬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정치는 유권자가 선거를 통해 통제하고 국민은 관료·사법체제에 의해 통제되고, 관료·사법체제는 정치에 의해 통제된다.

 그러나 오늘날 관료·사법체제에 대한 통제력은 몹시 약화됐다. 아니 정치는 관료·사법체제를 겉으로 통제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예속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기대난망이다. 결국 국민이 헌법을 잘 알아야 한다. 그런 국민들을 키워야 한다. 그래야 헌법을 통해 국민이 권력을 민주적으로 통제하고 진정한 주권자가 되어 제대로 된 먹이사슬 구조가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정치권이 헌법을 주물럭거리는 것은 주객전도다. 국민이 주도권을 잃은 헌법 개정은 어불성설이다. 헌법을 가장 홀대한 그들이 헌법을 빙자해 자신들 잇속이나 챙기려는 작태가 명약관화하지 않은가. 통찰·결단·설득·추진력의 덕목을 잃어버린 정치인에게서 진정한 제헌절의 뜻을 되찾아 온 것이 촛불혁명이었는데 벌써 우리 국민은 그때의 열정과 기대를 잃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안타깝고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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