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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 소장
젊은 시절 소니의 사각형 트랜지스터와 ‘워크맨’ 등에 매료당했던 기억을 가진 이들이 꽤 많다. 일본제의 위력(?)이 상상 외로 컸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 역사 교과서를 왜곡했을 때 흥분한 시민들이 일본제품 불매 운동과 왜색문화 추방을 소리 높여 외치며 일장기를 불태우는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결말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흥분이 가라앉으면 또다시 일본 제품을 구매하게 된다는 사실을. 이번에 아베 일본 총리의 한국에 대한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에 반발해 일어나고 있는 일본 제품 불매운동은 한동안 잊고 있었던 옛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어떻게 결말이 날까?

 사실 반일 감정을 표시하는 일본제 불매운동이란 것이 정당성 여부를 넘어 개인화된 사회에서는 그 자체로 불편한 구석이 꽤나 많다. 국가적, 집단적 광기를 동반하는 일도 문제고, 심기가 불편해 소비자로서 일시 구매 중지나 관광 보류는 할 수 있을 테고 각 개인으로 보면 별다른 감상조차 떠올리지 않을 수도 있다. 필자의 경우 현재 사용하고 있거나 구매할 뜻이 있는 일본 제품은 거의 없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마찬가지다. 냉장고·세탁기·TV는 물론 컴퓨터나 휴대전화 등등 대다수가 우리 삼성전자나 LG전자 제품이 대부분이다. 가성비가 높은 잡다한 물품들은 거의 다 중국산이다. 사케나 맥주 등 몇 가지 식품을 제외하면 일본 제품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럼 아베 일본 총리의 허튼짓이 별 것 아닌 것으로 끝날까? 우리의 반일 감정이나 불매운동이 효과 없이 끝나고 말까? 아닐 것이다. 우선 우리 자신을 되짚어 보면서 ‘과거’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1991년 탈냉전과 함께 온 기회를 적극 받아들여 동유럽이나 중국 등과 수교를 맺고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의 기간을 헤맬 때 성큼 도약했다. ‘일본에 근대화가 뒤져 불행한 역사의 시간을 보냈지만 세계화에서는 몇 걸음 앞서거나 뒤처지지 않고 성공적’으로 나아갔음을 자부하기도 했다. 주요 20개국(G20) 회의도 일본보다 10년 앞서 유치했고, 전자 분야 세계 1위이던 소니를 저 멀리 따돌리고 삼성전자가 1위에 우뚝 서게 됐다. 글로벌 코리아의 모습은 여러 방면에서 크게 빛났다. 이런 모습이 오늘날에는 퇴조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중국과의 관계나 일본과의 관계에서 더욱 심하다.

 지리적 거리가 가까운 이웃 국가들과 관계를 보면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독도를 방문해 한일 관계가 뒤틀리기 시작한 이래 계속 악화일로다. 올 삼일절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친일 잔재 청산은 너무나 오래 미뤄둔 숙제"라고 거듭 강조한 취지가 국수주의적 반일의 적개심을 부추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현재 나타나는 현상은 지나치다 못해 가히 공포 수준이다. 원산지가 일본인 향나무 교목(校木)도 깡그리 없애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가치동맹’을 통한 글로벌 연대의 확대·강화가 국가 발전은 물론 존립의 바탕이 되는 시대에 될 법한 일이 결코 아니지 않은가.

 아베의 경제 보복은 이런 우리의 감정 대응을 더욱 부채질한다. 아니 그가 의도하는 바가 심상치 않다. 미·일 동맹을 강화하고 대중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우리를 옥죄려 한다. 일각에서는 미국과 사전 교감 아래 한국 반도체를 타깃 삼아 일본의 도시바와 미국의 웨스턴디지털·마이크론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에 철저한 트럼프 대통령의 스타일을 감안하면 지나친 억측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엔 께름칙하다. 한국과 일본의 갈등이 본격화되면 트럼프 대통령은 누구 손을 들어줄까 곰곰 따져보자. 우리 편이 돼주는 게 쉬워 보이지 않는다. 만약 이것이 현실화된다면 참담한 일이다.

 과거에 연연하는 국민감정이나 과거에 초점이 맞춰진 행동으로 미래의 동력을 만들 수 없다. ‘과거’로는 ‘미래’를 이길 수 없다. 아베의 의도를 좌절시키려면 우리가 먼저 성찰해야 한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기적을 이뤄내 부러움을 샀던 대한민국, 그 점을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이성적이고 거시적으로 반일이 아닌 극일(克日)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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