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에쿠스’, ‘여정’, ‘야성’, ‘동행’, ‘아리랑’, ‘화수분’, ‘크로바’. 이 단어들이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는지 눈치챈 독자라면 최소 30대 중·후반은 넘겼으리라. 인천시 미추홀구 제운사거리에 자리잡은 불법 유흥업소들의 이름이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아니 아직도 일부는 밤마다 붉은 빛을 내뿜으며 술에 젖은 남성들을 유혹한다. 해당 업소들은 남성들에게 술만 파는 공간이 아니다. 일명 ‘방석집’이라고 불리는 변종 유흥업소다. 도시의 어둠에 먹힌 이곳이 청년들의 희망 공간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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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연 이사, 이순희 팀장, 신혜림 대표(왼쪽부터).
# 변종 유흥업소가 청년창업 특화거리로

 미추홀구는 2017년 9월부터 변종 유흥업소 밀집지역인 제운사거리부터 용일사거리 주변을 ‘청년창업 특화거리’로 조성하기 위한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당시만 해도 24곳의 변종 유흥업소가 남아 영업하던 제운사거리 일대는 대학, 초·중·고등학교, 주택가 등이 밀집된 곳이기도 했다. 아이들의 교육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동네 자체를 슬럼화시키는 원인 중 하나였다.

 구는 변종 유흥업소와 청년일자리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고 도시재생을 통해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목표로 인천에서 처음으로 ‘청년 창업희망스타트 지원사업’을 시작했다. 변종 유흥업소가 청년들의 창업공간으로 대체될 수 있도록 창업을 희망하는 만 39세 미만 청년들에게 구가 시설 리모델링 비용 1천만 원과 임대보증금 1천만 원, 임차료 50% 및 전문가를 활용한 맞춤형 경영 컨설팅, 구 홈페이지 홍보 등을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올해 1월까지 총 6개의 청년 창업공간이 마련됐다. 1호점인 ‘L2스튜디오’를 비롯해 3호점 ‘로스팅 카페인’, 4호점 ‘클림’, 5호점 ‘오셰르’, 6호점 ‘오늘의 꽃들’ 등이다. 2호점은 현재 공모가 진행 중이다.

 이 중 과거의 공간에 미래의 꿈을 담아 청년 창업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클림’의 신혜림(32)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 ‘클림’ 건물 외관.
# 칵테일과 케이터링 청년창업 공간 ‘클림’

 "지난해까지는 부평에서 가게를 운영했어요. 9.9㎡ 공간 두 칸을 쓰다가 리모델링을 하게 돼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다시 들어오기는 어려웠어요. 월세가 올랐거든요. 특히나 우리는 고정비를 줄이는 게 중요해서 상황이 되질 않았죠. 그러던 중 지인분이 미추홀구에서 하는 청년 창업희망스타트 지원사업을 알려 줬어요. 처음에는 협소하고 열악해 막막했는데 지금은 24시간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 정말 좋습니다."

 ‘클림’은 케이터링 업체다. 쉽게 풀어 쓰면 ‘출장 뷔페’와 비슷한 영업을 하는 곳이다. 다만, 구매자들이 파티나 모임을 하며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류 등 ‘핑거푸드’를 주로 제공한다. 특히 핑거푸드는 ‘이것’을 보조하기 위한 상품이다. 클림의 주력은 바로 ‘칵테일’이다.

▲ 인천 미추홀구 용현동에 자리한 칵테일·케이터링 업체 ‘클림’ 사무실과 주방.
 신혜림 대표는 공대를 졸업했다. 원래 꿈도 과학자고,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다만 분야는 다소 독특하다. "‘술’이라는 건 신약으로 먼저 탄생됐어요. 저 역시 신약을 개발하고 싶어서 관련 개발학과를 전공했고 회사도 다녔죠. 그러던 중 ‘내가 개발하고 싶었던 신약이 술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에는 독학도 하고 학원에 다니면서 책으로 칵테일을 배웠죠. 술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술의 역사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등을 공대 쪽으로 풀어갔어요. 칵테일이 어떻게 보면 화학 쪽과도 연관돼 있잖아요."

 신 대표의 주량은 소주 반 병이지만 술에 대한 사랑은 무한대다. 회사를 다니며 주말에는 부평구 인근에 있는 상동 호수공원에 손수레를 끌고 나갔다. 자신이 만든 칵테일을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해서다.

 평일에는 집 앞 ‘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칵테일의 기초를 배우고 밤 12시부터 새벽 2시까지는 독서실에서 ‘술 공부’를 했다. 그의 칵테일 손수레는 점점 입소문을 탔고, 파티에 와 달라는 요청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케이터링 사업의 시작이었다.

# 청년과 시니어의 어울림으로

 "외국은 파티 문화가 발달돼 있어요. 간단한 술, 독하지 않은 칵테일과 안주를 곁들이면서 서서 얘기를 나누는 거죠. 사람들이 찾으니 더 재미가 있더라고요. 회사에 다닐 때는 ‘내가 이걸로 최고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칵테일 쪽에서는 최고가 될 수도 있다는 판단이 섰죠. 사업에 뛰어들게 된 이유입니다."

 대기업에 다니던 신 대표의 아버지는 적극 추천했다. 자신은 평생 한 직장을 다녔지만 딸은 꿈이 있다면 이것저것 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그의 가족 역시 가끔 저녁마다 막걸리를 한 병 사 놓고 TV를 보는 애주가 집안이다.

▲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이순희 팀장.
 "칵테일이 주였는데 핑거푸드를 합쳐야 하는 시기가 왔어요. 같은 회사에 다니던 상사였는데 지금은 클림 이사님이에요. 돈 벌게 해 주겠다고 꼬셨죠. 둘이서 강남, 서초동에 핑거푸드를 배우러 다녔는데 아무리 해도 몇십 년 된 손맛을 따라가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시니어분들을 직접 고용해 함께 파티플래너를 하게 됐답니다."

 클림이 부평전통시장 내 위치한 지하상가에서 문을 열었을 때는 주 고객층이 시니어였다. 젊은 층을 예상한 것과는 정반대였다. 클림을 찾는 시니어들은 "과거에는 칵테일을 배운다는 것이 술집이나 다방에 취직하기 위해서라는 색안경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칵테일을 마시고 클림에서 제공하는 교육을 받기도 했다. ‘핑크레이디’라는 칵테일 속에 자신의 추억을 풀어냈다. 취업을 원하는 시니어와 청년창업가가 만나게 된 계기다.

 클림은 청년 대표와 중년의 이사, 시니어 팀장이 함께 어울려 근무하는 공간이 됐다.

 클림에서는 도시재생지역에서 주민 화합에 도움이 되는 음식 교육도 진행한다. 주민들이 화합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같이 음식을 만들고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아무리 향초를 만들어도, 노래교실을 해도 화합이 쉽지 않다는 게 관련 공무원들의 하소연이다. 클림에서는 이사와 팀장이 함께 도시재생 현장에 가 손님이 집에 왔을 때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핑거푸드를 교육한다. 술안주에도 좋은 음식들이다.

 사업 외 활동으로 신 대표는 강연에 나선다. ‘술로 푸는 인문학’ 등 술 공부를 하다 보니 역사나 지리를 남들보다 자세히 알게 됐다. 서울대를 비롯해 각계각층에서 신 대표의 강연을 듣기 위해 초청하고 있다.

 "재미있는 삶을 살고 싶다면 창업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해요. 저는 적극 추천합니다. 다만, 재미없이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창업은 비추예요. 일이 재미있어서 하다 보면 돈이 따라오는 거죠. 그리고 지금까지 책을 많이 읽을 줄 아는 사람으로 키워 주신 부모님께도 감사 드려요. 아버지가 독서실과 책방을 데리고 다니셨거든요. 특히 공부하라는 말을 하지 않아서 더욱 감사 드립니다."

 이병기 기자 rove0524@kihoilbo.co.kr

사진=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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