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가 1965년 국교정상화 이후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대법원의 ‘강제 징용피해자 배상’ 판결 여파가 외교와 경제는 물론 안보와 동맹의 문제로까지 확산되는 모양새다. 급기야 18일에는 이성적·합리적 소통이 결여된 반지성주의(反知性主義) 언행까지 나왔다. 청와대 회동에서 민주평화당 정동영 대표는 "지금 우리 앞에는 애국이냐 매국이냐 두 가지 길밖에 없다. 애국의 길로 가기 위해 일사불란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국 민정수석은 페이스북에 "중요한 것은 ‘진보냐 보수냐’, ‘좌(左)냐 우(右)냐’가 아니라 ‘애국이냐 이적이냐’이다"라는 글을 올렸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의 말이라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전체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선동적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아베 총리는 그동안 신뢰하기 어려운 행보를 보여왔다. 그래서 일본의 경제보복을 ‘선거를 앞두고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한’, ‘다가올 한국발 경제 위협을 견제하기 위한’ 꼼수로 보는 견해도 많다. 하지만 다수의 일본 국민들 역시 이번 조치를 지지하고 있다. 기존 노선으로 문제 해결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우리 자신의 비합리성도 돌아봐야 한다. 우선 국내법 판결이 외교 영역에 여과 없이 투사되는 작금의 방식부터 개선해야 한다. 사법부가 개인의 ‘인권존중’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소중하게 다뤄야 하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국익과 충돌하는 외교 문제는 ‘사법자제(judicial self-restraint) 원리’가 적용되는 게 상식적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나,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징용피해자들의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일본측 입장도 대승적 차원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노무현 정부도 2007년에 특별법을 만들어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지원금을 대신 지급했다. 그렇게 결단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정신을 계승하는 게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무릇 지도자라면 역사적 감정이 깃든 자존심이든, 옳다고 여기는 정치 신념이든 그 추상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그래야 국익을 쫓으며 국민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다. "원칙과 실용주의를 결합하지 못하고, 필요할 때 타협하지 못하는 무능이 우리의 모든 정치적 담론을 잘못된 길로 몰고 간다"는 영국 메이 총리의 퇴임사를 새겨들어야 한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