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jpg
▲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웃터골이라는 명칭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879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화도진도(花島鎭圖)에 ‘上基洞’(상기동)이라는 지명이 나타나면서부터이다. ‘웃 터에 자리잡은 마을’이라는 의미의 웃터골은 인천 개항 이전 높은 언덕이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군 지휘소였던 요망대가 설치돼 있어 묘도와 제물포 포대 등 화도진 소속의 포대들을 지휘 통제했던 군사 요충지였다.

 전근대에 있어 체육은 곧 국방력이었고, 체육 자체가 국방력을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격구(擊球)를 위한 너른 터나 연무장처럼 군사 훈련장과 같은 운동장은 이미 존재해 있었지만, 오늘날의 운동장이나 경기장 개념은 근대의 산물이어서 서구 스포츠나 학교의 체육 수업 등을 위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축구, 야구 등 근대 스포츠 전래에 선구지였던 인천은 일찍부터 구기 종목을 위한 운동장을 필요로 했다.

 인천이 개항하기 한 해 전인 1882년 영국 군함 플라잉피시(The Flying Fish)호가 한·영수교 이후 수로 측량을 위해 인천항에 들렀을 때 수병들이 상륙해 축구경기를 벌였다고 하는데, 그들은 잉글랜드 출신답게 무기와 식료품에 더해 축구공까지 싣고 동아시아로 온 것이었다. 또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야구가 들어온 것은 1905년이지만 이보다 6년 앞선 1899년 일본인들이 인천에서 야구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그들의 운동 장소가 ‘웃터골운동장’이었다고 회자되고 있는데, 웃터골이 자연적으로 형성된 천연분지였고 평편하고 넓은 자연의 공터가 운동장 입지로서 제격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런 추측이 생겨난 듯 보인다.

 웃터골은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철도감부(지금의 철도청)의 합숙소가 됐다가 인천부 소유가 된 땅이었다. 인천은 개항 이래 일본인의 진출이 많았고 인천의 조선인들은 유독 민족적 차별에 신음해야 했기 때문에 인천의 3·1운동은 만국(자유)공원에서부터 배다리시장에 이르기까지 그 열기가 대단했다. 1919년의 3·1운동은 일제의 무단정치를 문화정치로 바뀌게 했는데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한국인의 민족운동을 겉으로 드러내게 한 연후 거기에 맞춰 통제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체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분지 형태의 ‘웃터골’이 보다 구체적인 운동장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20년으로 사회 전반의 유화 분위기와 맞물려 있었다. 인천부는 조선체육협회와 용산철도 야구부의 협조로 웃터골을 고르게 닦고 넓혀 이해 11월 1일 공설운동장을 조성했다. 이것은 서울의 경성공설운동장보다 6년, 부산공설운동장보다는 8년이나 빠른 것이었다. 공식 명칭은 산근정(山根町) 공설운동장이었고 편의시설은 수도꼭지 몇 개와 화장실만 있었을 뿐이었으나 한국 최초로 등장한 실험적 체육공간이었다.

 그러나 인천의 웃터골운동장은 그저 단순한 스포츠 경기장이 아니었다. 고단한 식민지 민중의 쉼터면서 울분을 삭이던 곳이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일제는 이런 저런 핑계로 연합운동회 중지를 강요했다. 이 시대를 풍미하던 한용단(漢勇團)은 서울의 양정이나 배재, 중앙, 휘문 등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경인철도를 타고 한강을 오가며 국권회복에 대한 염원을 모아 만든 조직으로 ‘한강(漢江)을 오가는 용맹한 인재’들의 모임이었다. 그들은 인천의 희망이었고 미래의 등불이었다. 이들의 경기가 있을 때면 온 인천이 들썩거렸던 이유였고, 웃터골운동장은 일제의 의도와는 다르게 인천 조선인들의 환호와 감동, 한풀이와 단합의 자리였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한국인의 건장한 체형에 대해 "중국인들과도 일본인들과도 닮지 않은 반면에 더 잘생겼고, 한국인들은 일본인에 비해 훨씬 체격이 좋다"고 했다. 조선인은 스포츠 분야에서 일찌감치 강세를 드러냈다. 특히 일본인들과 경기는 질래야 질 수가 없고 져서도 안 되는 것이 식민지 조선의 한국인이었다. 그후로도 지금까지 가까우면서 먼 듯한 이웃과는 영원히 긴장관계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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