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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연 인천문인협회장
지인 한 분이 약으로 쓰기 위해 적자소엽을 뜯어가고 싶다는 전화를 했다. 사무실에서 근무 중이라 밭에 동행할 수 없어 자물통 비밀번호를 알려줬다. 그녀는 봄에 도시락을 싸가지고 와 나물을 뜯어갔고 얼마 전에도 매실을 따갔기에 경계심조차 품지 않았다. 해서 적자소엽 말고 다른 과일은 일절 손을 대지 말라는 주문을 따로 하지 않았다. 상식이 통하는 분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몇 시간 후 그녀는 일을 마치고 귀가했다는 전화 끝에 동행한 두 분이 토마토를 땄으며 셋이 나눠 가졌다는 소식을 전해 줬다. 적자소엽을 따러 혼자 간 줄 알았더니 승용차를 태워다 준 분과 약으로 쓸 실수요자가 동행했다고 한다.

 게다가 토마토뿐 아니라 보물처럼 키우고 있는 참외까지 손을 댄 모양이다. 나와 사무국장은 너무 황당해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책임감을 통감한 그녀는 시장에서 대신 구입해 변상하겠다고 했다.

 지난 5월 초, 이제는 농사일이 힘에 부쳐 다른 농산물은 포기하고 참외 모종만 심겠다고 하자 사무국장이 대신 고구마와 토마토를 심겠다는 제안을 했다. 작년에 얻어간 고구마와 줄기가 맛있었고 토마토는 항암치료 중인 동생의 남편이 너무 좋아해 직접 재배하고 싶다는 것이다. 시장에서 파는 토마토도 있지만, 온실에서 재배한 것은 노지에서 키운 것만큼 달고 풋풋한 맛이 안 난다고 했다.

 모종을 사러 가자 주인은 항암 채소라며 적자소엽 모종을 덤으로 주었다. 나는 참외, 오이, 호박을 심고 사무국장은 고구마와 토마토를 심었다. 처음 심는 작업은 함께했지만 사무국장의 자택이 밭에서 멀어 그 후 과정은 거의 내 몫이었다.

 올해는 날이 가물어 모종을 심자마자 근 3개월간 이틀 간격으로 새벽이나 저녁에 모기와 싸우며 지하수를 공급했다. 퇴비를 주고 잡초를 뽑아주며 정성을 쏟았지만 작황은 좋지 않았다. 차라리 그동안 밭에 오가며 길에 뿌린 돈으로 농수산물시장에 가서 사 먹는 편이 편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신세진 분들께 정성이 묻어나는 농작물을 선물하고 싶어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참외와 고구마에 물을 주다가 장마가 시작되고서야 한시름 놓으며 무성한 토마토 줄기를 지지대에 끈으로 묶어 놓았다. 그동안 사무국장은 수확한 토마토 중 상한 것만 골라 먹고 실한 것은 모두 상자에 넣어 제부에게 택배로 보냈다.

 며칠 전, 토마토를 따며 노랗게 익기 시작한 참외도 거둘까 하다가 남겨뒀다. 박사학위 과정을 위해 곧 출국할 막내딸에게 아빠의 땀방울이 서린 농익은 참외를 먹이고 싶어서다. 이렇게 애지중지 키워온 토마토와 참외에 이방인이 손을 댔다는 소리를 듣고 퇴근 후 밭으로 달려갔다.

 설마 했는데 빨간 토마토와 남겨둔 노란 참외는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 망연히 서서 허망한 광경을 보는 순간 사무국장에게 했다던 그들의 변명이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농사를 포기하고 방치한 것 같아서… 참외가 고인 빗물에 잠겨 상할까 봐… 비 맞으면 토마토가 터질까 봐… 시골에서는 이런 서리가 별일 아니어서 …." 차라리 이럴 땐 침묵이 금이란 생각이 든다.

 며칠 전 반소매 남방과 양복바지 차림으로 밭에 들렀다가 쓰러진 토마토 나무를 보고 길 가던 자식이 넘어진 듯 깜짝 놀라 맨손으로 달려들어 일으켜 세우느라 상하의가 엉망이 된 적이 있었다. 아내는 토마토 물이 들었다며 두 번씩 손빨래를 했는데 오늘은 빗물에 샤워까지 했으니 집에 가면 또 한소리 들을 게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자초지종을 밝히자 아내는 절도 행위가 아니냐며 기함을 내뱉는다.

 그동안 많은 분이 농장에 와 약초와 나물과 농작물을 수확해 갔지만 내 허락 없이 손을 댄 예는 없었다.

 오늘 서리를 한 그는 전에 참외 선물을 받은 적이 있으니 그냥 따먹어도 된다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한두 개가 아니라 싹쓸이를 한, 예의와 상식에 어긋난, 행동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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