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과 차이의 인정’은 이상(理想)사회에서나 존재해야 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가까운 현대사만 봐도 그렇다. 현실은 다른 정권, 다른 조직이 기존 정권·조직을 엎고 들어서면 여지 없이 보복의 메커니즘이 작동된다. 기존 세력을 적폐화(積弊化)하고 이를 뿌리 뽑는다며 혁신이라는 기조를 내세워 상대에 대한 강등과 좌천, 유배, 옥살이 등 피의 숙청을 시작한다. 일단 내 밥그릇부터 챙기고 남의 밥그릇은 빼앗는 것이다. 전국 정치판만 그런 건 아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쪼끄만 조직도 동일한 작동기제가 판을 친다. 철들 무렵부터 집 안팎에서 보고 배운 게 편가르기와 험담, 오욕과 누명으로 남을 깎아 내려 자기세력을 구축하는 게 거의 전부라고 여겨질 정도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도시 생활에서 패권(覇權) 쟁탈전이 펼쳐지는 것이 마냥 부자연스럽지는 않다. 문제는 그 지저분함의 정도다. 또 ‘쳐 내림’의 기준인 조직에 대한 천착(穿鑿)과 진의(眞意)는 헤아려지지 않는다는데 있다.

 우리 모두는 헤게모니 재창출 과정에서 벌어지는 지독한 정치적 보복과 숙청에 익숙하다. 이를 눈감아 줄 수 있는 것은 ‘그럴 만하다’는 개연성이 깔려 있다. 또 사실상 양당 정치 구도에서 ‘너도 고생했으니 이제는 먹고 살아야 하지 않냐’는 측은지심(惻隱之心)도 제법 작동한다. 여기에 상대가 내려 놓을 때를 모르고 내려 놓지 않느니 칼로 쳐야 한다는 이치도 있다.

 그러나 불확실한 먼 항해의 키를 잡은 배의 선장은 소인배들의 밥그릇 싸움에 말려 들어서는 안 된다. 누가 국가의 미래에 천착해 청사진을 그리고 있는지, 누가 조직의 미래를 탄탄하게 세워갈 궁리(窮理)만 하는지 알아 볼 수 있어야 한다. 자기 배만 채우는지, 모두의 주린 배를 걱정하는지 분별할 수 있는 혜안(慧眼)이 절실한 이유다. 들여다 보면 다 자기 입지와 바로 앞에 놓인 자기 살 길만 찾고 있음을 수장(首長)은 매의 눈으로 챙겨 봐야 한다. 특히 적폐 씌우기, 오명 씌우기에 좌고우면(左顧右眄)해서는 안 된다. 상대의 언행과 개인사는 경험치를 바탕으로 세간의 평판을 더해 판단하면 될 일이다. 혜안은 개혁, 진보, 혁신은 없었고 극보수(極保守)만 존재함을 알게 해준다. 보복은 허언(虛言)에다가 선택적 논리를 씌운 허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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