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는 구부러지고/ 살갗은 느릅나무 껍질을 닮은 노파

 헝클어진 머리 위에 가을이 내려앉고/ 깊은 눈에는 노을이 들어앉았다.

 늦가을 한기가 입가에 서리고/ 한 올 한 올 밀어 올리는 저 여린 촉수/

 안간힘이다.

 한 뼘 터가/ 생의 전부인 듯/ 초겨울 난전에

 하루를 폈다가 접는 느린 등허리. <필자의 시 ‘노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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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현숙 인천문인협회 시분과장
지역 요지마다 이마트, 롯데마트와 홈플러스 등 대형 상권이 자리 잡는가 싶더니 동네 골목마저 대형마트가 독차지하고 있다. 생활비가 떨어지면 치부책에 이름과 금액을 적고 배고픔을 달랬던, 서민들의 애환을 품고 있는, 구멍가게는 이미 흔적을 감춘 지 오래다.

 하지만 제아무리 백화점과 대형마트가 호황을 누려도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재래시장은 나름대로 기존 고객과 더불어 곳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날로그적인 판매 방식을 기저에 깔고 있기 때문일까? 재래시장에 가면 고향에 온 듯 왠지 마음이 정겨워지고 푸근해진다. 오늘도 석남동에 자리 잡고 있는 강남 재래시장에선 좁다란 골목 양쪽으로 아침이 시끌벅적 열린다.

 빛바랜 천막을 둘둘 말아 올리고 낡은 좌판을 깐 자리엔 오늘 팔려나갈 물건들이 가지런히 진열되고 있다. 상인들의 바쁜 손놀림과 함께 통닭이 구워지는 동안 누군가 군침을 흘리며 지폐 한 장 들고 기다린다.

 그 옆에서는 꽁꽁 얼어붙은 동태 나무 상자가 팔뚝이 굵은 아저씨 손에 들려 콘크리트 바닥에 사정 없이 패대기쳐진다. 얼굴을 맞대고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일렬로 나란히 누워있던 동태는 충격을 이기지 못한 채 힘없이 떨어져 나간다. 이어 주인의 날렵한 손놀림이 껍질을 벗기고 포를 뜬다.

 그때 젊은 아낙이 가게에 들어와 머리통이 큼직한 아귀의 입을 벌려보며 값과 신선도를 가늠해 본다. 꽃무늬 몸뻬 바지와 반짝반짝 눈부신 비닐 슬리퍼가 주인을 기다리는 쇼윈도를 지나치면 먹음직한 순대가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며 식욕을 자극한다.

 얼마쯤 지났을까, 인심 좋은 할머니가 좌판 위에 쌓여있는 나물을 손님에게 한 줌 쥐어주고 또 쥐어주신다. 인정을 앞세우며 저렇게 막 퍼 주고 나면 본전은 고사하고 손해를 보지 않을까 살짝 걱정된다.

 저만큼 낡고 오래된 천막 속에서 야구 모자를 눌러 쓴 낯익은 여인이 호떡을 굽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녀에겐 얼굴 화상 때문에 갖게 된 지난한 삶의 그림자가 있다. 흉한 상처를 가리려 그녀는 늘 야구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있다. 악몽을 잊기 위해 골방을 박차고 바쁘고 소란스럽게 돌아가는 삶의 터전인 재래시장에 나와 입술을 깨물며 오랜 세월 안간힘을 써왔다.

 "수고하십니다."

 철판에 기름을 두르던 그녀가 살갑게 나를 맞아 주며 나의 제자였던 두 자녀의 소식을 자랑스럽게 전해준다. 뜨거운 열기로 노릇노릇 구워지고 있는 이 구수한 호떡과 그녀가 감수해 온 인고의 세월이 자녀들을 기어코 어엿한 사회인으로 만들었다. 한때는 수줍고 가냘프던 젊은 아낙이었지만 이제는 중년 여인이 돼 버린 이 여인에게 인내로 버텨온 이 낡은 천막은 아직도 여전히 꿈이고 희망이며 삶의 터전일 것이다.

 오래된 천막과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상인들, 그들 사이를 비집고 손님을 부르는 호객 소리가 시끌벅적한 골목 안에는 그들만의 애틋한 사연도 함께 메아리치고 있다.

 "자 한 보따리 오천 원, 한 보따리 오천 원…"

 석남동 강남 재래시장에 가면 활기찬 세상살이를 볼 수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를 마다하고 재래시장을 찾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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