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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소장
헤일리 전 유엔대사는 미국 외교술의 노하우(?)를 밝힌 적이 있다. "어떤 것을 협상하려 할 때는 우선 상대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상대가 두려워하는 것이 뭔지, 뭘 이익이라고 생각하는지 등. 그러고 나서 우리가 그들로부터 원하는 것을 취하고 그게 그들 자신의 결정에 따른 것이라고 믿게 해야 한다."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요술방망이 같은 외교술이라고 자화자찬한 것일 텐데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 즉, ‘상대가 두려워하는 것이 뭔지, 뭘 이익이라고 생각하는지 등’이다. 작금의 한일 역사전쟁과 경제전쟁에서 우리는 반성하지 않는 일본 우익과 성찰하지 않는 한국 수구세력의 ‘거짓화해’가 남긴 산물을 곱씹어 봐야겠으나 적어도 아베 총리의 입장에서 뭘 두려워하는지 뭘 자신의 이익이라고 여기는지는 정확히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미 전쟁(?)이라고 했으니 ‘싸워 이겨야 한다’는 명제만큼은 결코 양보할 수 없다고 할지 모른다. 하나 아베에게 이긴다 해서 문제가 해결된다고 볼 수 없다. 또 하나의 역사만 기록돼서는 미래가 암담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독일과 프랑스의 경우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이 두 나라는 1870년에서 1945년 사이에만 국운을 건 세 차례의 대전을 했다. 일본 군함 운요호가 인천 앞바다에서 만행을 저지르던 때보다 조금 앞서 보불전쟁을 치렀고, 한국이 일본에 강제 병탄돼 신음하던 초기에 1차 세계대전, 그리고 일제강점기 후반에 그들은 2차 세계대전에서 싸웠다. 근대 이후 최악의 적대국가였던 것이다. ‘철천지원수’였던 두 나라가 화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63년 독불협정을 맺고, 이후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 대통령과 헬무트 콜 슈미트 독일 총리, 미테랑 대통령과 콜 총리 등 양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정치 노선과 국가 이익을 뛰어 넘어 돈독한 우정을 쌓았고 양국 도시 간에 거의 3천 건에 육박하는 자매결연이 맺어졌으며 800만 명이 넘는 양국 젊은이가 상호 교류를 했다. 이제는 역사교과서까지 공동집필하는 사이가 됐다. 최근 조사에 보면 서로를 ‘가장 좋아하는 이웃’으로 꼽고 있다고 한다. 독일과 프랑스의 이런 변화가 동북아에서는 불가능할까?

 물론 쉽지 않다. 1963년 독불협정의 프랑스 정상은 드골이었다. 그는 레지스탕스 지도자였고 독일군 점령 하에 있던 조국을 해방시킨 상징이었다. 여기에 비해 1965년 한일협정의 한국 정상이었던 박정희는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으니 화해를 향한 진정성 면에서 비교조차 안 된다. 그리고 독불협정은 양국 국민의 동의 하에 이뤄졌으나 우리의 경우는 국민의 뜻에 거스르는 ‘관제 협정’의 한계가 너무나 뚜렷했다. 지금도 한일협정을 둘러싼 국내 갈등이 상종해 심지어는 아베의 조치를 환영하는 듯한 발언이나 우선 문재인 정부부터 비판하려는 세력이 있다. 현재의 한일 간 전쟁은 표면적으로 일본의 수출 규제 때문에 출발됐고, 그 근저에 아베의 헌법 개정 노림수나 ‘저팬 패싱’에 대한 반사적 의도를 지적하는 경우가 많이 있으나 심층적으로는 지난 백여 년간의 응축된 적대적 반감이 폭발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해방 이후 여러 차례 식민시대에 대한 유감 표명이나 사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양국 간에 진정한 화해가 있었던 적은 없다. 냉전체제에 기생하는 한국의 수구세력과 일본 극우, 그리고 한·미·일이라는 동맹체제의 틀 안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던 적당 선에서의 봉합이 이제 실밥이 터지고 새로운 국면을 맞아 수면 위에 떠오른 것이다. 마침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와 마사토시 변호사 등 일본의 지식인 75명이 지난주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해 아베 정부의 수출 규제 철회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서명운동을 알리는 성명에서 단도직입적으로 "한국이 적(敵)이냐"고 아베에게 물으면서 "이번 조치는 한국 경제에 치명적 타격을 줄 수 있는 적대적 행위"라고 규정했다.

 역사는 니체의 말처럼 비판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탄핵당해야 마땅하다.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의 행적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그렇다고 지금 국수주의적 반일(反日) 감정이 대세인 것처럼 여겨서는 곤란하다.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 유용한 역사, 맞서는 것도 필요하지만 화해의 길을 냉정히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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