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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미 시인
여름이 한창이라 햇볕이 뜨겁다. 청령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서자 이마에서 주르르 땀이 흐른다. 한들거리는 금계국 사이로 벌들이 부지런히 날아들고 하늘에는 흰 구름이 한가롭게 떠간다. 청령포는 솔숲에 가려져 있고 휘돌아 나가는 서강의 강물 위에 나룻배가 한 척 떠 있다. 수년 전, 영월 근방에서 ‘장릉’이란 단종의 묘 안내 표지판을 보았을 때 어린 나이에 유배돼 죽어간 단종 생각에 콧등이 시큰해졌던 일이 떠오른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데 영월 땅을 직접 밟고 서 있는 것이다. 그것도 어린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 앞이라니! 나룻배가 떠 있는 청령포의 풍경은 그야말로 한 폭의 동양화다. 강나루로 내려가는 계단은 몇 무리의 탐방객들이 입은 옷으로 알록달록 길게 물들어 단풍을 연상케 한다. 파라솔과 모자의 색깔도 화려하다. 바라보이는 청령포의 한쪽은 험준한 층암절벽 육육봉이요, 삼면은 강이니 마치 섬 같아서 가히 육지의 고도(孤島)라 할 수 있겠다. 강 건너 모래밭과 솔밭이 자아내는 경치가 또 그대로 그림이다.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넌다. 강물은 비가 내린 지 오래여서인지 그다지 깊어 보이지 않는다. 강폭도 넓지 않아 단종이 헤엄을 쳤어도 유배지에서 나올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흐르는 강물에도 단종의 넋이 녹아 있고 부는 바람에도 그의 숨결이 묻어오는 듯하다. 솔밭 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돌담 안으로 단종 어가가 보인다. 왼쪽에는 종들이 묵었다는 초가 한 채가 있고 마당에는 단종지묘비가 세워져 있다.

 단종 어가를 들여다보니 갓을 쓴 채 남색 두루마기를 입고 앉아 책을 보고 있는 단종의 밀랍 인형이 있다. 단종의 옆에 시중 드는 사람이 보이는데 그가 바로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체를 몰래 수습해 장례를 치른 영월의 호장 엄흥도이다. 엄흥도는 눈에 덮인 땅들이 모두 얼어 있어 땅을 파기 어려웠으나 노루가 앉았던 자리는 얼지 않아 그곳을 파고 장례를 치렀다. 하늘이 무심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단종의 초라하고도 엄숙한 모습을 보자 숙연해지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조선의 6대 임금에서 노산군으로 다시 서인으로 강봉돼 열일곱 나이에 청령포에 유배된 단종은 자신을 낳고 사흘 만에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을 업어주던 할아버지 세종의 인자한 모습과 집현전 학자들에게 세자를 부탁하고 요절한 아버지 문종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복위를 위해 충정을 아끼지 않은 사육신들의 죽음을 떠올리며 오열하고 생이별을 한 정순왕후가 보고 싶어 피눈물을 흘렸으리라.

 솔숲을 헤쳐 온 바람은 그의 탄식 소리에 같이 울었으리라. 청령포에는 관음송이란 600년 된 소나무가 있는데 청령포에 유배된 단종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觀), 슬픔과 울분으로 가득 찬 단종의 오열(音)을 들었을 것이라고 해서 관음송(觀音松)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고즈넉한 솔숲의 분위기가 인상적이기도 하지만 하늘을 보니 둥그렇게 하늘길이 열려 더 절경이다. 멀리 강나루 옆을 바라본다. 하얗게 보이는 것이 왕방연의 시비라고 문화해설사는 말한다. 1457년 단종이 청령포에서 머물던 여름, 홍수가 져서 청령포가 잠기자 단종은 영월부사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겨 머물게 됐다. 그해 시월에 단종은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게 된다. 당시 금부도사였던 왕방연이 사약을 들고 가서 단종의 최후를 보았다. 왕명을 거역할 수 없어 집행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실제로 왕방연의 마음은 슬프기 한량없었다. 단종을 생각하며 지은 그의 시는 내 마음을 울린다.

 -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단종이 죽지 않고 끝까지 임금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집현전 학자들과 더불어 더 찬란한 문화를 꽃피울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할아버지 세종을 능가하는 존경 받는 임금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서쪽 산 능선을 오른다. 단종이 한양 땅에 두고 온 왕비를 생각하며 눈물로 쌓은 망향탑이다. 돌 틈에는 아직도 그의 그리워하는 마음이 녹아 있는 것 같다. 깊은 시름에 잠겨 있던 바위 절벽 끝 노산대를 본다. 해질 무렵, 멀리 한양 쪽 땅을 바라보며 수심 가득한 얼굴로 서 있는 그를 상상한다. 육육봉 옆으로 흐르는 서강의 물줄기가 층암절벽을 흘러내리며 모래톱 사이로 흘러간다. 비정한 권력에 무참히 스러져간 어린 넋의 한과 설움도 말없이 흐르고 있다.

※필자 : 2013년 『대구문학』신인상 등단/<시산작가회> <시란>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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