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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재학 제물포고 교감
고등학교에 밤 11시까지 온 교사동에 불이 켜져 있던 시절, 한국을 찾은 외국인은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나라로 마냥 신비스러워 했다. 서구 유럽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요 불가사의한 일로 한국의 교육현장을 취재하기도 했다. 그때 그 시절이 불과 얼마 전쯤 일이지만 사실 그랬다. 새벽부터 심야 시간까지 불 켜진 교실 모습이 한강의 기적처럼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일어나던 일상의 모습이었다.

 공부를 좋아서 하는 학생은 없다지만 심야까지 불 켜진 교실에 공부에 신들린 학생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은 지나친 비하일까?

 왜냐면 하면 할수록 재미있는 게 공부라는 과업의 속성이니까 말이다. 적어도 심야에 교실 불을 끄고 귀가하던 발걸음에는 일종의 희열과 성취감이 교차하는 오묘한 심리가 함께 작동했다. 그때 그 시절을 살아 온 기성세대는 ‘심야 야자’란 말만 들어도 고통과 불만의 날카로운 비판보다는 다시는 올 수 없는 아련한 추억이자 고향처럼 마음의 향수를 느끼게 해주는 삶의 한 단편이었다. 공부의 힘이 느껴지던 청춘의 시절이었기에 공부로 인해 거울 속에 비친 초췌한 모습에서도 일종의 희열과 행복감을 느꼈다. 이는 과거에 대한 지나친 미화일까?

 일찍이 공자와 맹자가 공통적으로 꼽았던 것은 바로 ‘공부의 즐거움’이다. 두 사람은 전쟁의 시대에 세상을 평화롭고 아름답게 만들어 가려는 이상(理想)을 갖고 평생 노력했던 철학사상가였다. 그들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부를 통한 성찰과 성장의 삶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공부의 즐거움을 알았기에 평생을 두고 공부할 수 있었고,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수많은 제자들을 키워냈던 것이다. 하지만 공부란 공자·맹자와 같은 탁월한 학자들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또한 그때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반드시 필요하다.

 「명심보감」에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캄캄한 밤길을 가는 것과 같다(人生不學 冥冥如夜行·인생불학 명명여야행)’는 구절이 이를 잘 말해 준다. 배움은 항상 처음일 수밖에 없는 인생의 길을 걸어갈 때 겪어야 하는 시행착오를 줄여준다. 또한 다가오는 인생의 장애물에 대처할 지혜를 주고, 쉽게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돼준다.

 이제는 평생교육 시대이다. 과거처럼 일순간 집중적인 암기 공부가 평생을 좌우하는 힘을 배양하던 공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식의 수명은 생각보다 훨씬 짧다. 하룻밤을 자고 나면 새로운 지식은 홍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그 지식은 이제 암기할 필요가 없다. 손가락 하나만으로 클릭하면 무궁무진한 지식의 창고로 우리를 안내해 준다. 그곳엔 세상의 모든 지식이 존재한다.

 문제는 어떻게 이 지식들을 내 것으로 유용하게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곧 ‘무엇(What)’이 아니라 ‘어떻게(How)’가 삶의 질을 좌우하고 성공을 이끄는 열쇠다. 이는 정보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좋은 정보를 어떻게 얻어 쓰느냐의 문제이다. 결국 지속가능한 힘의 원천으로 연계되고 이 힘을 얻는 근저에는 공부라는 평생과업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공부, 이제는 신개념의 차원을 모색해야 한다. 레고처럼 기존 지식을 짜 맞추기나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마르지 않는 샘물을 길어 올리기 위해 땅 밑의 물줄기를 탐색해 우물터를 만들고 그 주변을 아름답게 꾸며서 누구나 찾아오고 이용이 가능한 샘으로 만들어야 한다. 공부는 달고 시원한 생명수를 제공해주며 지속발전이 가능한 힘의 터전인 지혜의 보고(寶庫)를 만드는 것이다.

 지금처럼 변화가 무쌍한 시대에 공부만큼 미래를 위한 확실한 예금이 없고 이는 곧 지속성장의 힘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제는 평생 공부의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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