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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영<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이분법은 대상 전체를 둘로 나누는 논리적인 방법입니다. 여기에서 ‘방법’이라는 낱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방법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분법으로 나누는 이유는 사물의 본질을 규명하기 위함입니다. 예컨대 남자와 여자, 선과 악, 동양과 서양, 인간과 자연 등과 같이 세상을 둘로 나누는 목적은 서로 다른 종(種)의 특성을 파악함으로써 서로의 장단점을 알아내고, 그 결과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주거나 장점을 장려함으로써 개개의 종들이 더욱 더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함이 목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에서는 이분법적 사고의 결과로 서로를 ‘적’으로 여기곤 합니다. 예를 들어보면, 남자가 스스로를 ‘선’이라고 여기면 여자는 ‘악’이 돼 버리고, 보수를 ‘선’이라고 여기면 진보는 ‘악’이 돼 버립니다. 인간이 ‘우월하다’고 믿으면 ‘자연’은 정복해야 할 ‘적’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이렇듯 이분법적인 사고는 세상을 끊임없이 왜곡시키고 분열시켜 결국은 공멸하게 합니다.

 「마음을 가꾸어주는 작은 이야기」에 나오는 예화가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공항대합실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여성이 근처 상점에서 책과 과자 한 봉지를 샀습니다. 책을 읽으며 과자를 먹던 그녀는 아까부터 자신 옆에 앉은 남성이 여성의 과자 봉지에서 과자를 꺼내 먹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뭐라고 말할 수가 없어 그냥 모르는 척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과자봉지는 점점 비어 갔고, 드디어 과자가 하나만 남았습니다. 그녀는 그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 궁금했습니다. ‘하나만 남았는데 저 사람이 이것까지 먹진 않겠지?’

 그때였습니다. 남성이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바라보더니 하나 남은 과자를 집어 들고는 절반으로 나눴습니다. 그리고 반쪽은 그녀에게 내밀고 나머지 반쪽은 자기 입에 넣는 게 아닌가요?

 참 뻔뻔스러운 남자지요? 여성도 그를 ‘나쁜’ 남자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게 규정하고 나니 그가 미소를 짓든 과자를 건네든 짜증만 났을 겁니다. 결국 화가 난 여성은 그를 경멸하듯이 노려보다가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윽고 탑승했습니다. 좌석에 앉은 그녀가 책을 가방에 넣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가방 속에는 자신의 과자봉지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이렇듯 저 사람은 ‘나쁘다’라고 규정하는 순간부터 전체적인 맥락을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분법의 오류입니다.

 사람들과 관계에서 빚어지는 오해와 그로 인한 갈등은 이렇게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으로 서로를 판단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옳고 그르다고 규정하기 전에 잠시만이라도 전체를 바라보는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류시화 시인의 산문집인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에서 이런 여유의 필요성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인도의 명상센터에서 생활하던 초기에 나는 무의식에서 분출해 나오는 걷잡을 수 없는 내용물들로 정신이 위태로웠다. (…) 어딘가를 돌아다니다가 뼈만 앙상해져 돌아오면 함께 공부하던 친구가 보리수 아래에서 날 껴안으며 말했다.

 "넌 맛이 갔어." 그러고는 내 등을 어루만지며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걱정 마. 아주 맛이 간 건 아니니까. 포옹만큼이나 그 말이 나에게는 큰 위안이고 힘이었다. 내가 아직 ‘아주 맛이 간’ 것은 아니었으니까."

 ‘너는 이렇다’ ‘너는 이래야만 해’라는 식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불분명한 것이 명확해지는 듯이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분열과 갈등의 늪으로 빠져들기 쉽습니다. ‘옳고 그르다’는 이분법은 보다 나은 결과를 도출해내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나’와 ‘너’ 모두에게 성장의 계기가 돼 서로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본의 아니게 나와 너 모두가 과자도둑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잠시만이라도 지금의 판단을 늦추고 ‘하지만 걱정마’라고 말해주는 여유가 지혜가 돼 우리의 삶이 조금은 더 부드럽고 조화로워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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