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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장원(인천재능대학교 교수)
근대 개항기 사진 자료로 인천지역을 연구한다. 여러 경로를 통해 수집한 자료를 보면서 그동안 알고 있던 역사적 사실을 재확인하기도 하고, 가끔은 새로운 사실을 찾기도 한다. 초기에는 주로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중구청 일대를 중심으로 그들의 건축 활동에 초점을 두고 접근했지만 몇 년 전부터는 개항을 맞이한 조선 정부의 노력을 규명하는데 주력하는 중이다. 망한 나라 조선으로 폄훼됐던 조상들의 건축 활동을 밝혀 인천을 보다 입체적으로 보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다.

 시선을 바꾸니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는 ‘인천’이란 표현이 없어 공통자료로 분류했던 ‘학생과 교사’라는 제목의 사진엽서에 등장하는 건물이 인천향교임을 밝히기도 했다.

 자연스레 인천향교로 관심이 이어져 근대 개항기 인천지역 초등교육기관까지 살펴보는 과정 속에서 창영초등학교의 개교 시점에 명백한 오류가 있음을 알게 됐다. 그동안 창영초등학교는 ‘1907년 4월 1일 관립일어학교 교실을 임시교실로 개교하고, 부윤, 면, 동장에 알려 학생을 모집했으나, 입학생은 3명이었으며, 5월 18일이 돼서야 6명의 학생이 입학했다’라는 인천부사의 기록을 근거로 1907년을 개교 시점으로 설정해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나라 사람을 교육하기 위해 세운 인천지역 공립초등교육기관의 시초는 1899년에 개교한 부평소학교라는 주장이 지역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인천에는 1895년 7월 19일에 공포된 ‘소학교령(칙령145호)’에 따라 설치된 인천공립소학교가 있었다. 1896년 1월 22일에 인천공립소학교 교원으로 ‘변영대’라는 사람이 임명됐고, 그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부)교원의 임명과 해임이 승정원일기, 독립신문, 한성순보 등에 등장한다. 또한 1907년에 반포된 보통학교령에 따라 설치된 보통학교는 소학교를 계승했기 때문에 창영초등학교의 개교 시점은 18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06년 8월 27일에 반포된 보통학교령으로 세운 보통학교를 시원으로 삼았던 건 전국적인 현상이다. 일제가 조선이 세운 소학교의 역사를 말살했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이를 자각하고 전국에 산재한 다수의 초등학교들이 소학교령으로 개교한 소학교를 시원으로 바꾸고 있지만 인천에서는 아직까지 이러한 움직임이 없다. 창영초등학교의 개교 시점은 즉시 수정돼야 마땅하다.

 인천공립소학교의 위치 규명도 필요하다. 1896년 개교 이래 12년간 인천지역 어린이들에게 근대교육을 실시했던 인천공립소학교의 위치를 밝히는 일은 개항장의 성격을 보다 명확히 한다. 소학교의 위치에 대해 개인적으로 의견을 구한 전문가들은 인천감리서 안에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필자는 인천향교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지속적인 사료발굴과 연구로 정확한 규명이 필요한 대목이다.

 창영초등학교의 개교 시점을 살피는 계기가 된 사진에는 학생 35명과 교사 2명 등 총 37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단정한 옷차림이 인상적인 이들은 110여 년 전의 인천인들이다. 앞줄에 선 28명 중 2명은 악기를 입에 대고 있고, 뒷줄에는 학생 4명과 함께 서있는 교사로 추정되는 젊은이와 망건을 쓴 노인 1명이 있다. 철봉에 매달린 3명의 학생도 인상적이다. 사진 속 학생과 교사는 어느 학교 소속이었을까라는 의문이 여전히 남는다. 인천부 공립소학교, 인천항 공립소학교, 인천군 공립소학교 등으로 불렸던 인천공립소학교일까. 이당 김은호 선생이 측량기술을 배웠다고 자서전에 쓴 ‘인흥학교’일까. 아니면 또 다른 학교일까. 의문이 꼬리를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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