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4월 2일, 응봉산에 위치한 만국공원(현 인천시 중구 자유공원)에서는 은밀하고도 결의에 찬 움직임이 있었다. 전국 각계의 뜻을 모아 ‘한성정부’ 조직을 결의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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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진 작은전시 전경 <사진=인천시 제공>
한성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모체다.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만세운동을 하나로 뭉치고, 보다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이어가고자 각 지역 대표자대회를 통해 수립됐다. 그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 바로 만오 홍진(1877~1946)이다.

대한제국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였던 홍진은 나라를 운영할 조직의 필요성을 깨닫고 한성정부 수립을 주도했다. 한성오와 이규갑 등 독립운동에 뜻이 있는 동료들과 만나 근대적인 민주공화정 정부를 만들기로 했고, 전국 13도 대표자대회를 계획했다.

홍진은 대표자들이 모일 장소로 자신의 선영(先塋)이 있는 곳이자 한때 조선의 국제 항구였던 만국공원을 택했다. 3·1운동 등으로 일본의 감시가 훨씬 삼엄해진 만큼 대표자대회는 어느 때보다 비밀스럽게 진행됐다. 경기지역과 주요 종교단체 대표 20여 명은 서로를 알아볼 표식으로 손가락에 헝겊을 두른 채 만국공원으로 모였다.

이날 대표자들은 민주제와 대의제(代議制) 등 오늘날 헌법적 가치가 고스란히 담긴 약법(約法)을 내걸었다.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추대하고, 각 지역 국민대표의 이름으로 한성정부가 결의됐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23일 서울 종로에서 ‘국민대회 취지서’와 ‘국민대회 선포문’을 배포해 한성정부 수립을 널리 선포했다.

당시 한성정부 외에도 중국 상하이(임시정부)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대한국민의회) 등에 임시정부가 생겨났다. 홍진 등 한성정부 요인들은 이 소식을 접하고 해외로 망명해 그곳 임시정부에 힘을 보탰다. 1919년 9월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에서 국민의 뜻을 모은 정통성을 인정해 한성정부를 중심으로 세 임시정부를 통합했다. 마침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홍진은 임시정부의 수반인 ‘국무령’을 맡았다. 그리고 지금의 국회의장인 ‘임시의정원 의장’을 세 번이나 역임하며 민주공화정과 의회정치의 기틀을 다졌다. 광복 이후에는 비상국민회의 의장직을 맡아 통일정부 수립에 애썼지만 결실을 보지 못한 채 1946년 눈을 감았다. 훗날 임시정부 주석에 오른 김구가 그의 친구다.

이처럼 한성정부와 홍진의 발자취를 되돌아볼 수 있는 전시회가 인천시립박물관에 마련돼 관람객들의 관심이 뜨겁다. 지난 4월 2일 시작된 작은 전시 ‘만오 홍진, 100년의 꿈을 쓰다’이다. 이 전시에서는 한성정부 국민대회 취지서 및 선포문은 물론 1946년 홍진의 장례 당시 비상국민회의가 건립한 묘비가 선보인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으로서 홍진의 업적을 재조명할 수 있는 사진과 유묵(遺墨) 등도 만나 볼 수 있다.

전시는 오는 10월 27일까지 계속된다. 박물관 관람시간은 월요일과 공휴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김희연 기자 khy@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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