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옥순 할머니가  자신의 강제징용 경험을 밝히면서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다.
▲ 이옥순 할머니가 자신의 강제징용 경험을 밝히면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어. 그저 나 같이 억울하게 끌려 갔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알아주기만 하면 돼".

 지난 13일 의정부시에서 만난 이옥순 할머니는 90세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정정한 모습이었지만, 굽은 양손의 검지가 고된 그의 삶을 짐작게 했다.

 일제강점기이던 80년 전 10살에 불과했던 이옥순 할머니는 고향인 강원도 평강에서 동네 친구와 함께 집을 나서야만 했다. 긴 칼을 찬 일본 순사의 집마다 한 명씩 일을 하러 가야 한다는 협박에 이 할머니는 홀아버지를 모시던 친구와 함께 서로를 다독이며 영등포 방직공장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부터 일본의 방직공장까지 7년간의 할머니의 유년시절은 일본에 의한 강제노동으로 얼룩졌다.

 이 할머니는 "내가 배우는 게 참 빨라. 먼지로 자욱한 공장에서 솜뭉치의 실을 뽑는 게 우리가 하던 일이었어. 굵은 실에서 점점 얇은 실을 뽑아내는 거지. 우리끼리 말을 할 수 있기를 하나, 눈짓 한 번 주고받을 수 있나. 그렇게 거기서 친구랑 헤어졌지. 지금은 그 친구가 죽었는지 살아있는지도 몰라"라고 회상했다.

 영등포 방직공장에서 1년여가 지난 어느 날 밤 또다시 일본인 순사들은 설명도 없이 노동자들을 기차에 태웠다.

 이 할머니는 "밖을 못 보게 다 가린 기차를 타고, 또 배를 타고 끌려 가는데 물어볼 수가 있어야지. 도착해 보니 일본 방직공장인 걸 알았지"라고 설명했다.

 방직공장에서 가장 어린 노동자였던 이 할머니는 광목을 짜는 기계에 손이 닿지 않아 기계 위에 배를 깔고 손을 뻗어서 겨우 광목을 짰다.

 이 할머니는 "일을 잘하니까 기계를 한 대, 두 대씩 더 맡기더라고. 열두 대까지 방직기계를 돌리는데 그 조그마한 게 얼마나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녔겠어. 그런데도 조금이라도 늦어지거나 실 한 올이라도 끊어 먹으면 바로 ‘빠가야로’, ‘조센징’ 그러면서 빨리 하라고 불호령이 떨어졌어"라고 말했다.

 강도 높은 노동을 강요하면서도 하루 세 번 지급되는 강냉이 날것 반 줌과 소금물 한 컵이 제공되는 음식의 전부였다. 반복되는 방직 업무에 이 할머니의 양손 검지는 점차 굽어지고 있었다.

 이 할머니는 "같은 기숙사에 있던 언니들은 배를 곯다 못해 공장 담장을 넘어 도망치다 다리가 부러지고 갈비뼈가 부러지고 그랬었지. 밤에 몰래 일본인 식당 앞에 버려진 음식물쓰레기통을 뒤져서 언니들한테 무 껍질이나 참외껍질 같은 걸 가져다줬어. 그걸 수돗물에 씻어서 맛있게 먹는 거야. 그렇게 배를 곯았어"라며 눈물을 훔쳤다.

 끝날 것 같지 않던 7년간의 노동 끝에 종전을 앞둔 1945년 8월이 돼서야 할머니는 일본인 기숙사 사감에게서 휴가를 받았다.

 이 할머니는 "휴가를 나와 집에 있는데 우리나라가 독립이 됐다는 거야. 눈물을 막 흘리면서 태극기를 갖고 길거리로 뛰어나갔어"라며 감격스러운 순간을 회고했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아침이면 태극기를 걸고 밤이면 거두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최근 일본과의 갈등과 관련해 이 할머니는 "우리 국민들이 똘똘 뭉쳐서 일본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줬으면 좋겠어. 일본 애들이 잘못한 거잖아. 다시는 우리가 일본의 밑이 아니라는 걸 보여 줘야 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임하연 기자 lhy@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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