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jpg
▲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우리나라에 근대적 금융기관인 은행이 설치된 것은 강화도조약 체결 한 달 후인 1876년 3월 일본제1은행이 부산에 사설 은행을 설립한 것이 최초였다. 1883년 인천이 개항함에 따라 조선은 그간 받지 못하던 관세(關稅)를 최초로 받게 되는데 이때 관세를 취급하는 은행이기도 했다. 점차 일본 상인과 거래량 증가에 따라 1888년 9월 인천출장소를 인천지점으로 승격하고 동년 10월에는 서울에 인천지점 서울출장소를 개설할 정도로 번성했다. 조선의 경제계는 그들의 자본침략 앞에 속수무책이었고, 해운 수송이나 철도는 물론 조선 경제 전반에 걸쳐 ‘돈되는 사업’에는 모두가 일본 상인에게 장악당하는 형국이었다.

 일본인 금융기관이 한국에 진출함에 따라 이에 대항하는 민족계 은행을 설립하자는 논의는 일찍부터 있었다. 그러다 1894년 갑오개혁 당시 조세의 ‘현금납부’가 시행됨에 따라 화폐와 미곡의 적절한 공급을 위해 민족은행 설립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청과 일본 상인의 활동이 증가하면서 한전(韓錢) 환전(換錢)의 수요 증대로, 삼국 상인 간의 환거래 확대는 한전 수급을 위한 금융기구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우리 힘으로 근대적 은행을 설립한 것은 1896년 6월 조선은행과 1897년 2월의 한성은행이었다. 정부 고위관료들이 주체가 돼 설립된 이들 은행은 정부로부터 국고(國庫)인 조세 취급권을 받아 영업을 시작했지만 별다른 영업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세력의 부침에 따라 영업이 크게 좌우되고 있었다. 조선은행이 독립협회세력의 제거로, 한성은행이 새로운 한러(韓露)은행 설립으로 각각 조세금 수송의 특혜를 상실한 후 은행영업은 크게 위축, 폐업될 수밖에 없었다.

 1899년 1월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이 설립됐다. 서울의 유력한 상인들이 중심이 돼 주도하고 황실과 고위직 관료 또는 황실 측근 세력들이 참여해 설립된 은행이었다. 당시 제출한 청원서를 보면 ‘화폐융통(貨幣融通)은 상무흥왕(商務興旺)의 본(本)’을 창립 이념으로 삼았고, 조선사람 이외에는 대한천일은행의 주식을 사고 팔 수 없다고 명시하는 등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고 외세로부터 은행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다. 은행명 또한 당시 일본 제일은행을 의식해 ‘하늘 아래 첫 번째 은행’이라는 대한천일은행으로 명명했다. 특히 고종의 윤허를 얻어 왕실의 내탕금까지 지원받아 설립했기 때문에 일반은행 역할과 함께 황실은행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했다.

 대한천일은행은 설립 2달 후 곧이어 화물의 집산지와 상업 거래가 많은 인천, 목포, 부산, 개성 등 지역에 지점 설치에 대한 청원서를 탁지부에 제출했으나 인천과 개성만이 인허를 받았다. 인천은 당시 최대 수출입 무역항이었고 개성은 황실(皇室)이 장악한 인삼매매업의 토대였기 때문이었다. 1899년 5월 23일 황성신문 광고에는 5월 10일 인천항 탁포(坼浦, 신포동)에 지점이 창설됐음을 광고하고 있다.

 이때 인천의 지점장은 관(官)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 활발하게 상업 활동을 하던 서상집(徐相潗)이었다. 그는 1885년 인천 조계내의 순신창회사를 미국인 타운센드에게 양도한 후 그 회사 대리인이 된 바 있었고, 1897년에는 인천항 객주와 유지 50여 명으로 구성된 인천신상협회(紳商協會), 1899년에는 신상회사를 조직해 한상(韓商)을 보호했다. 그는 인천 객주세력의 대표격 인물이었고 이러한 경력이 후일 1902년 서상집이 인천 감리에 임명되는 계기가 됐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천일은행은 상인들의 자금 회전을 지원할 목적으로 설립된 은행으로, 영업의 중심은 어음할인, 대출, 외환거래 등 상업금융업무였다. 서울과 인천을 무대로 한상뿐만 아니라 일상, 청상 등을 상대로 이들에게 상업 신용을 제공하고 외국환, 각종 어음거래 등을 통해 이윤을 확보해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우리나라 금융제도는 일본의 식민지정책에 의해 정비되는데 결국 국가의 운명과 궤를 같이할 수밖에 없었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