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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흥구 인천문인협회 이사
아내가 참외를 내왔다. 방금 냉장고에서 시리도록 찬 것을 껍질을 곱게 벗겨 먹기 좋게 썰어서 접시에 소복하게 가지런히 얹어 내왔다. 더운 날 잘 익은 참외를 먹는 맛이란 더없이 즐거운 일이다. 아내는 이렇게 가끔 깍두기처럼 썰어놓은 참외를 이쑤시개나 포크와 함께 내온다. 아들 녀석은 난작난작 찍어서 한 입에 쏙쏙 잘도 먹지만 나는 영 제맛이 안 난다. 그래서 난 아내에게 껍질만 벗겨 통째로 내오게 하거나 가운데 한 번만 갈라 내오라고 주문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아내의 곱지 않은 눈총을 감수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리 조심해 먹는다고 해도 통째로 씹어 먹고 난 후면 참외 속 내용물을 흘린다거나 씨가 떨어져 돌아다니기 때문에 아내는 늘 앙살이다.

 그래도 참외란 양 끄트머리를 잡고 게걸스럽게 깨물어가며 먹어야 제맛인 것을 어찌하랴. 아직 그 버릇을 못 버리는 이유는 또 한 가지가 있다. 참외를 먹을 때마다 문득문득 할머니 얼굴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지금은 남동산단으로 변해버린 보루네오 공장 부근에 큰 밭이 있었다. 여름이면 그 큰 밭에 콩과 함께 드문드문 수수 또는 들깨를 심어 일 년 양식을 만들었다. 할머니는 눈뜨기 무섭게 식전에도 들에 나가 콩밭 몇 이랑을 매고 오거나 조반을 먹고 난 후에도 바로 호미를 챙겨 들고 밭으로 나가는 게 일과였다. 어린 마음에도 할머니가 너무 안쓰러워 방학 때면 곧잘 들에 나가 콩밭 매는 일을 거들곤 했다.

 그럴 때마다 늘 혼자이던 할머니는 너무나 신바람이 나서 당신만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랫가락을 흥얼거리거나 당신의 어려웠던 시집살이며 피난 시절 죽을 고비를 넘겼던 얘기를 쉴 새 없이 해대기 시작했다. 반 키만큼 자란 무성한 콩밭 속을 헤집고 콩밭 매기란 여간 고역이 아닐 텐데도 어린 손자가 심심해할까 봐 그러는 것이다. 땅에서 올라오는 칙칙한 지열과 하늘에서 내리쬐는 태양열이 고스란히 콩밭 속에서 합쳐져 땀범벅이 된 얼굴에 가슬가슬한 콩잎이 스칠 때마다 그 후줄근한 기분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런 콩밭을 할머닌 한 이랑을 다 맬 때까지 한 번도 일어설 줄 모르지만 난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몇 번이고 일어나 꾀를 부리기 일쑤다. 다시 엎드려 몇 이랑의 콩밭을 매고 나니 할머닌 땀을 연신 훔치며 쉬었다 하자고 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쉴 참도 없이 쏜살같이 밭두렁을 넘어서더니 건너편 논두렁 가에 숨겨둔 참외 한 개를 풀 섶에 쓱쓱 문질러서는 먹으라고 주는 것이다. 잘 익은 김마까 참외였다. 할머니가 무슨 돈이 있다고 사서 줄 리는 만무하고 오다가다 길섶의 남의 참외밭에 열린 잘 익은 것을 눈여겨보았다가 슬쩍 따서 숨겨둔 것이다. 지금이야 사시사철 넘쳐나는 것이 과일이지만 그때는 한여름 수박이나 포도 등은 언감생심 생각도 못 하고 무녀리 참외 한 개 못 먹어보고 여름을 지난 때가 많았었다. 수중에 돈은 없고 먹고는 싶고 어쩌랴, 남의 밭 참외 서리가 다반사였다. 그냥 눈감아주며 지나가는 주인도 있지만, 기어이 잡아내어 잘못했다 빌어도 보지만 그동안 없어진 참외들을 다 물어내라는 악질(?) 주인도 있었다. 이러다 주인에게라도 들키면 어쩌려고 할머니는 그 짓을 감행했을까?

 할머니가 준 참외 한 개를 목마른 김에 다 먹어 치웠다. 한 입 먹어보라는 말도 없이 먹어 치운 손자에게 섭섭한 기색도 없이 할머니는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할머니가 겨우 먹어본 것이라고는 내가 먹고 남은 꽁지 부분과 굵게 벗겨낸 껍질에 붙은 살을 윗니로 긁어내어 맛만 보는 것으로 흡족해 했다.

 나는 오늘도 아내가 깎아준 참외를 볼 때마다 할머니 생각에 가슴이 메어온다. 참외 껍질에 붙은 속살마저 아깝다며 먹는 할머니에게 아내가 그랬던 것처럼 한 입에 쏙쏙 들어갈 수 있도록 잘게 썰어 입에 넣어 드리고 싶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아내에게 핀잔을 듣더라도 통째로 된 참외 먹기를 고집할 것이다. 참외를 먹을 때마다 콩밭 맬 때 풀 섶에 쓱쓱 문질러 주던 할머니와 그 참외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 : 1996년 「수필과 비평」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1998년 제1회공무원문예대전 수필부문 동상/2010년 수필집 「그 여자네 집」 발간/전 인천시의회 문화복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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