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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재웅 변호사
한일 무역분쟁이 한창이다. 일본이 공식적으로는 부인하고 있으나 이번 분쟁의 원인이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보복조치라는 것은 자명하다. 강제징용 판결은 판결의 결과가 가지는 외교적 의미도 크지만, 한일 간 입장 차이가 극심한 쟁점을 정면으로 다루면서 판결의 이유에서 설시한 판단이 가지는 법적의미도 크다. 이 판결에 대해서 일본이 과민반응 하고 있는 것은 징용피해자들의 청구를 인용했다는 것 뿐만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대한 이번 판결의 역사 인식을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강제징용 판결문에서 명시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전제가 되는 판단은 한일병합조약의 무효 시점에 대한 문제이다. 한일병합조약은 처음부터 원천무효라는 입장과 2차대전 연합국과 일본의 강화조약인 샌프란시스코 조약부터 무효라는 입장이 충돌한다. 전자의 입장에 의하면 일본의 식민지배 자체가 불법적인 것이므로 강점기 일본에 의해서 자행된 강제징용이 불법행위라는 결론에 쉽게 이를 수 있다. 반면 후자의 입장에 의하면 일본의 식민지배는 당시에는 합법적인 것이고 이후에 무효가 된 것이므로 강점기 일본의 법률에 따른 조치를 불법행위라고 주장·입증하는 것에 어려움이 따른다.

 한일 간에 한일병합조약을 무효라고 확인한 것은 1965년도에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이다. 한일기본조약 체결 당시에도 이 문제는 양국이 완전한 합의에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양국의 입장차이로 인해 조약 한국어판에는 ‘이미 무효’, 일본어판에는 ‘이제 무효’라고 다른 의미의 표현이 사용됐다. 영어판에는 ‘already null and void’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법률적으로 무효라고 하면 원칙적으로 처음부터 원천무효를 의미하므로 ‘null and void’라고 썼으면 논란이 적었겠지만 ‘already’라는 수식어를 넣어 영어판의 의미 역시 명확하다고 보기 어렵다. 일본 측에서는 한일병합조약이 합법적이라고 보아야 했기 때문에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합의된 돈도 배상금이 아니라 ‘독립축하금’이라는 명목으로 지급했다.

 한일병합조약이 원천무효라는 우리 측 주장에는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전하면서 식민지 지배권을 잃었다는 결과론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조약이 일본 측의 강압과 협박에 의해서 체결됐고 순종황제의 서명이 누락됐다는 조약 자체의 하자를 원인으로 한다. 다만, 국제법적으로는 조약에 대해서 당시의 기준과 현대의 해석 기준이 다르다는 점과 1900년대 초반에는 이 문제와 관련된 성문 국제법이 없기 때문에 해석상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한일병합조약이 언제부터 무효인지 여부는 역사적·법률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일본의 주장과 같이 한일병합조약이 2차대전 이후부터 무효라면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의 주권이 일본에게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독립을 선언한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부인해야 하며 임시정부의 지위도 인정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 일부에서 주장하는 건국절 논쟁도 이 문제와 관련이 있는데, 건국절을 주장하는 측에서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가 주권을 갖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한일병합조약이 처음부터 무효라는 것을 부인하기 때문에 나온 결론이다.

 우리나라의 헌법전문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우리나라의 입장은 이론의 여지가 없이 한일병합조약은 원천무효라는 것이다. 헌법에서 우리나라는 3·1운동의 독립선언과 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하고 있는 이상 일제의 식민지배가 당시에는 합법이라는 주장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 이번 강제징용 판결도 한일병합조약의 불법성을 전제로 하여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한 것이다. 일본은 2차대전에서 패전한 이후에도 우리나라가 독립국가라는 것을 부인하면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우리나라가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다. 결국, 우리나라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참여하지 못하고 별도로 한일기본조약과 한일청구권 협정이 체결되었으나 체결 과정이나 합의 내용에서 많은 문제가 있어 현재 한일 분쟁의 단초가 되고 있다.

 한일병합조약이 당시에는 합법적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본이 군국주의 시대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이 여전히 잘못된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한 양국이 발전적 미래관계로 나아가기 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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