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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두 번이나 거머쥔 세기의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은 수상의 영광을 안겨 준 ‘가스등(1944)’과 ‘아나스타샤(1956)’보다 영화 ‘카사블랑카(1942)’의 히로인으로 더욱 유명하다. 만인의 연인이 된 버그만은 차기작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3)’를 통해 아름답고 순결한 성녀의 이미지가 부각된다. 이후 수많은 작품에서 다채로운 캐릭터를 연기했음에도 보호본능을 유발하는 고결한 여인의 이미지는 일종의 꼬리표처럼 그녀를 따라다녔다.

 반면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180도 다른 버그만을 그의 영화 ‘오명(1946)’에서 선보인다. 청순 가련함을 벗은 과감하고 자유분방한 역할은 이전 캐릭터를 잊을 만큼 훌륭했다. 상대역인 케리 그랜트 또한 기존의 다정다감하고 재치 있는 모습 대신 속마음을 감춘 차가운 인물을 연기해 색다름을 선사한다. 첩보 스릴러라는 외피 속에 진지한 사랑 이야기를 품고 있는 영화 ‘오명’을 만나 보자.

 나치 스파이의 딸인 앨리시아는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연애 경력이 화려했으며 음주 또한 즐겼다. 그런 그녀에게 뜻밖에도 미국 정보부가 접근한다. 스파이 행적이 밝혀져 유죄 판결을 받은 아버지의 감형에 대한 권유와 협박, 미국에서 자란 앨리시아의 애국심에 대한 호소로 그녀는 정보부에 협력하게 된다. 임무 수행을 위해 상관인 데블린과 팀을 이룬 그녀는 근사한 이 남성에게 호감을 느낀다. 반면 조신한 숙녀와는 거리가 먼 앨리시아는 데블린에게 동료일 뿐이었다. 사랑에 적극적인 그녀와는 달리 데블린은 편견 어린 말들로 상처를 준다. 하지만 스며드는 감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앨리시아에게 나치 스파이의 핵심 멤버인 세바스찬을 유혹해 정보를 빼내라는 임무가 주어진다. 아버지의 지인이자 오랜 시간 앨리시아를 사랑했던 세바스찬은 금세 그녀에게 빠져들어 청혼하기에 이른다. 결혼을 말려 주길 바랐지만 차가운 데블린의 태도에 실망한 앨리시아는 세바스찬과 결혼을 하고, 계속해서 중요 정보를 미국에 제공하면서 데블린과 공적인 만남을 지속한다. 그러던 중 아내의 스파이 행동을 감지한 세바스찬은 그녀를 서서히 독살하려 한다.

 과연 스릴러의 거장이라는 명성답게 히치콕 감독은 영화 ‘오명’에서 두 가닥의 서스펜스를 효과적으로 접목시킨다. 스파이 영화로써 앨리시아가 위장 결혼한 남편에게 들키지 않고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과 진심을 숨긴 데블린이 목숨이 위태로운 앨리시아와 사랑을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한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가 흥미롭게 전개된다. 두 개의 서스펜스는 순차적으로 해결되는데, 앨리시아가 핵 원료인 우라늄을 숨긴 와인 병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긴장감과 불안함은 이 영화의 백미로 꼽힌다.

 그 뿐만 아니라 목숨을 잃어가는 상황에서 극적으로 등장한 데블린이 앨리시아를 구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은 드라마틱한 쾌감을 선사한다. 과거에 대한 편견과 불신으로 사랑을 거부하던 남성이 이를 극복하고 진실한 감정과 마주하는 영화 ‘오명’은 감독의 천재적인 연출력과 고정관념을 탈피한 배우들의 빛나는 연기로 완성된 첩보 멜로의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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