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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 소장
부모의 ‘문화자본’과 ‘사회자본’이 자식의 ‘명문대 학력’과 사실상의 신분 세습으로 이어지게 하는 핵심적 메커니즘으로 명문대 학벌이 도마 위에 올랐다. 법적으로 사유재산인 고려대나 연세대 등 명문 사립대는 몰라도 적어도 국립대학인 서울대와 여타의 국립대학들을 평준화해 통합 네트워크로 운영하는 것이 현행 법률 체계상 충분히 가능하므로 실시하면 좋겠다는 의견에서부터 아예 서울대를 없애는 것이 해결책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물론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다수의 서민들에게 서울대를 비롯한 명문대 학력이 부모의 힘으로 ‘2세 사회귀족’을 만드는 이 사회에서 최소한의 공동체 신뢰 구축은 불가능해 보인다. 특히 고소득자나 고학력자의 자녀가 아니면 여러 한계 때문에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대학 실험실이나 각종 기관·단체에서 인턴이 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학술논문의 제1저자가 되는 경력을 쌓는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서울대만 손보면 이런 문제가 말끔히 해소될까? 자녀의 미래에 대한 희망마저 박탈당한 현대판 평민들의 분노·좌절·절망이 서울대 없애는 것으로 해결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겠지만 문제의 핵심은 다르다는 사실이다.

 ‘베이징대학의 개혁’이 화제가 됐던 10여 년 전 미국의 한 언론에서 "베이징대학은 중국인들에게 하버드와 옥스퍼드, 에콜 노르말(프랑스에서 가장 경쟁적 시험을 통해 학생을 선발하며 졸업생들이 정계·재계·학계의 고위직을 차지한다)을 합쳐 놓은 것과 다름없다"고 보도한 적이 있다. 중국인이 사랑하는 중국 최고의 대학이자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이 대학은 중국의 근대화와 한 운명으로 엮였으며 20세기 초 교수진은 모두 중국 ‘신문화운동’에 참여했던 명사들로 루신(魯迅)과 센콩웬(沈從文) 같은 위대한 작가들은 물론 후스(胡適), 첸무(錢穆) 같은 저명한 학자들이 다수였고, 학생들은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일제히 일어나서 국가 정책에 획기적 영향을 미치는 사건을 주도했었다.

동시에 베이징대학은 미국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했다. 역사를 간직한 탑이 웨이밍 호수를 내려다보며 서 있는 캠퍼스는 미국인 건축가가 설계했고, 호수 근처에 있는 아름다운 중정(中庭 ; 집안에 정원이 있는 저택) 주택은 미국 선교사 스튜어트의 집이었다. 그리고 마오쩌둥의 전기를 쓴 애드거 스노의 묘가 캠퍼스 안에 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대학은 많은 것을 대표하게 됐고 지나칠 정도로 많은 것을 상징하게 됐다. 이런 배경에서 ‘베이징대학의 개혁’은 보존에 방점을 둔 것으로 구체제가 철폐되고 미국식 종신 재직 제도를 채택하며, 그때까지 내려온 전통대로 베이징대학의 졸업생은 교수로 채용하지 않고, 장차 자리가 비면 전 세계적으로 공개 모집하며 외부인을 초청해 교수평가 과정에 참여하게 하고 연구 활동이 계속 저조한 학과는 폐쇄할 것이며 교수들은 지정 받은 한 과목을 영어로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는 등등이었다.

 그 당시 중국의 대다수 대학들은 지나친 정치적 통제, 지적 자유 제한, 고용 과잉, 기금 부족, 상업주의의 팽배, 학문 수준의 저하, 제 식구 감싸기, 연고주의, 부패 같은 문제점을 공통적으로 안고 있었으므로 개혁에 대한 열망은 매우 높았고, 베이징대학을 비롯한 명문대일수록 개혁에 대한 열망과 방법을 둘러싼 논쟁은 매우 뜨거웠었다.

 오늘 우리의 명문대 학벌 문제에서 비롯된 사회적 위기의 해소책(?)으로 서울대의 존폐와 그 당시 중국의 대학 개혁 문제를 같은 선상에 놓고 얘기한다는 것은 그리 적절하지는 않겠으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 스스로 자랑할 만한 대학을 만드는 데 별 관심이 없다는 점과 기성세대가 허리띠 졸라매면서 버티는 이유가 그나마 내 아이라도 대학을 잘 나와서 좀 더 나은 직장을 갖고 편안히 잘 살았으면 한다는 생각에 젖어있다는 바탕 위에서 대학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의 재산 격차를 획기적으로 감소시킬 방안이 있는가? 서울대가 사라지면 명문대 학벌이 사라지고 대학평준화가 이뤄지는가? 오늘의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때만 되면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명문대 병(病) 치유책은 그야말로 허언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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