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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모 경인여자대학교 간호학과 교수
요즘 우리나라는 대내외적으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는 것 같다. 경제를 비롯한 모든 것이 자국의 정치적 논리에 좌지우지되고 국내 환경도 정치가 가장 앞서고 있는 현재는 정말 혼돈의 도가니 같다. 지금같이 정보가 홍수처럼 밀려나오는 시대에는 서로 다른 측면의 정보를 각자 생산해서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판단하기도 어렵게 만든다.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고 흠집을 내는데 도가 지나쳐서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목적을 위해서 현재 누구인가 제거돼야 한다면 윤리와 도덕은 고려해야 하는 대상에서 가장 먼저 없어져야 하는 대상이다. 정말로 무서운 세상이다. 목적을 이루는 것에 모든 것을 건다. 목적은 국민의 삶이 아니다. 그들 코앞의 이익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역사 유래상 가장 잘 살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동안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계층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내는 시대에 살고 있다.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은 청나라가 침략해 조선은 저항 한 번 못해보고 인조가 청나라 군에게 머리 조아리고 항복해 전쟁이 끝났다. 그 당시 청나라에 받쳐야 하는 조공에 조선의 여성이 있었고 해당자에는 기혼자도 포함됐다. 나라가 약해 끌려가야 하는 기구한 운명임에도 거부할 수 없었고 몇 년 후 고향으로 환향했는데 정절을 지키기 못했다고 손가락질을 당하는 신세가 된 유래가 된 단어 ‘환향년’ 혹은 ‘환향녀’는 지금까지도 그 단어가 풍기는 이미지가 좋지 않다.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나라 무력함의 아픔과 권력자들의 무책임함으로 인해 책임을 져야 하는 대상이 따로 있음을 알 수 있다. 사건을 벌이는 대상과 책임을 져야 하는 대상이 따로 있음에도 책임지는 대상에 미안함과 설명이 없는 시대가 이어져 왔었다.

 청나라의 강희제 시대인지 다음 옹정제 시대 기록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과 관계를 한 후 조선에 관한 기록에 권력을 가진 자들의 수탈이 심해 백성이 잘 살 수 없는 나라라고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아마도 예전부터 권력을 가진 자와 아닌 자와의 신뢰를 쌓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자신들의 의사 결정의 잘못으로 인한 백성의 괴로움을 뼈를 깎는 반성이 없이 그 책임이 고스란히 아무런 책임이 없었던 대상이 져야 하는 것은 현재에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그리고 그런 결정을 한 대상자들은 그들의 힘을 이용해 이리 저리 빠져나가니 어찌 서로 간 신뢰를 할 수 있을까?

 권력이 큰 만큼 의사 결정의 무게도 크며 잘못됐을 때 그 피해는 엄청나게 크다. 지금의 정치인들이 하는 행태를 보면 책임보다 혜택에 눈이 멀어 있고 그들이 져야 하는 책임에는 모두 외면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받고 있다. 사회적 자본인 신뢰는 하루 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자기 자리에서 그 위치에서 요구되는 규범에 기초해 정직하고 합리적이며 협동적인 행동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높을 때 신뢰가 형성되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번영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일본과 갈등을 빚고 있지만 우리나라보다 일본 국민들은 그들의 정치인에게 신뢰가 높다. 동시에 일본의 정치인은 국민에게 보편적으로 응해야 하는 책임에 외면하지 않아 왔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아베가 어떤 망발을 하든 일본 국민은 아베를 신뢰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정부에서 사회적 자본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을 그나마 다른 정부보다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신뢰의 결과를 거둬들이는데 이렇게 힘들어서야 더 낳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한 걸음이 가능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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