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얼아침대화가 처음 시작되던 1986년엔 파란만장했던 인천 최초의 프로야구팀 삼미 슈퍼스타즈가 간판을 내리고 청보 핀토스로 팀명이 바뀌었다. 인천은 수많은 선각자들을 배출한 도시였지만 분단과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뿌리 없는 도시로 전락해 버렸다. 우리 사회는 권위주의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 시위가 연일 이어졌고, 분단 40년 만에 남북한 사이에 고향방문단이 다녀가면서 분단체제에서 공존체제를 모색하는 움직임들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국제적으로는 이념의 장벽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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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년간 한결같이 이어온 새얼아침대화 역대 모습.
 그 무렵 새얼문화재단이 ‘아침대화Morning Forum’이라는 조찬대화 모임을 시작한 것은 매우 선진적인 행보였다. ‘시대의 아침을 여는 열린 대화의 장’이란 모토로 시작한 새얼아침대화는 모두가 숨죽이던 권위주의 시대에 순수 민간재단의 힘으로 이룬 보기 드문 사례였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중심의 힘에 짓눌리고, 이념과 시대의 무게에 숨죽어 있던 시대에 인천시민들은 아침대화를 통해 풀뿌리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이론적 중립의 토론장을 열었다. 그렇게 시작된 새얼아침대화는 2006년 4월로 만 20주년을, 2016년 30주년을 맞이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 아침대화는 어느덧 33년을 넘어 400회를 맞았다. 확실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시작된 행사는 마치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림 없이 오래도록 지속됐다.

 새얼문화재단은 ‘높은 산을 우러러보고, 큰 길을 따라간다(高山仰止, 景行行止)’는 마음과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움직인다(愚公移山)’는 의지, ‘바다는 물을 가리지 않는다(海不讓水)’는 정신으로 지난 세월을 지켜왔다. 이는 첫째로 새얼문화재단의 변치 않는 원칙을, 둘째는 새얼문화재단의 실천적 자세를, 셋째는 새얼문화재단이 지역문화운동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화합을 뜻한다.

 새얼아침대화는 사회 내부의 통합을 위한 구심점 역할을 해 왔다. 아침대화는 청장년 세대와 지역 원로가 한자리에 모여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자리다. 인천상공회의소의 회원과 인천의 노동조합단체 지도자들, 인천의 행정가들과 인천의 시민운동가들이 참석한다. 호남과 영남이, 강원과 충청이 한자리에 모인다. 개화기 이래 조선팔도 전국의 사람들이 일거리를 찾아 모이고,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신문물과 신지식을 찾아 모이던 인천의 모습이 되살아나게 한 데는 새얼아침대화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새얼아침대화는 인천은 물론 대한민국의 시민운동사, 지역문화운동사에도 중요한 행사다. 대외적으로는 5천 년 역사를 가졌다고 자랑하는 한국이지만 근대화의 우여곡절은 서울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을 역사도, 문화도, 뿌리도 없는 곳으로 고사(枯死)시켜 왔다. 그런 척박한 풍토 속에서 새얼아침대화는 33년이라는 세월 동안 전통과 혁신을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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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모습.
 새얼아침대화는 400회의 역사 속에서도 몇 가지 중요한 전통을 지켜왔다. 그 중 하나는 400회가 진행되는 동안 강사의 개인 사정으로 두 차례를 거른 것 외에는 빠지지 않고 매회 오전 7시 정각에 행사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한때 후진국 병이라고 지탄받았던 ‘코리안 타임’은 새얼아침대화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매회 정시 정각에 시작한다는 전통은 이제 아침대화의 모든 참가자에게 익숙한 버릇이 됐다.

 두 번째 전통은 매년 1월 초빙되는 인천시장을 제외한 모든 강사는 동일한 직위에 있을 때는 한 번 이상 초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 번째 전통은 엄정한 중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현직 정치인은 초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이 세 번째 전통에 약간의 예외는 있었다. 20주년 행사를 기념하고 인천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일환으로 제239회 아침대화 행사에 4당 대표를 초빙했다. 2006년엔 3월 한 달간 연속 4주에 걸쳐 민주노동당·민주당·한나라당·열린우리당의 당대표, 원내대표를 연속 초빙해 그동안 새얼아침대화가 지켜온 정치적 중립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대한민국을 이끄는 4개 정당이 생각하는 인천의 현주소를 다시금 확인했다.

 2007년 대통령선거 무렵에는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 민주당 정동영 후보를 초빙해 정책과 비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명박 제17대 대통령은 후보 시절엔 피치 못할 건강상 이유로 비록 아침대화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서울시장 재직시절 아침대화 자리에 섰었다. 새얼아침대화는 정부의 정책과 정당의 관심으로부터 소외돼 왔던 인천에도 시민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됐다.

 새얼아침대화는 매우 이른 시각에 열리는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매회 250명에서 300명가량의 인원이 자리했다. 매년 3천여 명의 인원이 참가한 것이다.

 2006년 새얼문화재단은 20주년을 기념하고 좀 더 나은 행사로 만들기 위해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10개 문항에 대해 152명이 무기명으로 참여한 설문조사에서 69%는 1년에 최소한 7회 이상(32%는 10회 이상) 아침대화에 참가한다고 응답했다. 이들이 아침대화에 참가하는 이유는 52%가 강사와 강연 주제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고, 31%는 새얼문화재단에 대한 애정 때문인 것으로 응답했다. 만족도를 묻는 설문에서 응답자의 96%가 만족스럽다는 답변을 했다. 이 중 36%는 ‘매우 만족스럽다’고 답했다. 이 같은 조사 결과에서도 알 수 있듯 새얼아침대화는 지역사회 소통과 대화의 구심점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아 가고 있다.

  홍봄 기자 spring@kihoilbo.co.kr

사진= <새얼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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