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 유지를 위한 가장 중요한 장치 중 하나인 제네바 핵합의가 폐기될 위험에 처한 것으로 보인다. 부시 행정부의 고위 인사들이 적극적으로 핵합의의 파기를 선언하지는 않았으나 결국 이 합의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입장을 표시하고있다. 지난 93년, 94년 위기 상황을 해결한 제네바합의의 의미와 중요성을 생각할 때, 그리고 또 한국 정부가 간곡하게 제네바 체제의 존속을 희망하고 있는 것에 비추어 볼 때 북한의 핵개발계획 시인과 뒤이은 제네바합의 폐기로 이어지는 이어지는 상황발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유감이나 표시하고있을 정도로 한가롭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일반적인 관측은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전쟁 준비에 집중하기 위해 북한 문제 처리를 잠시 유보하고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북한 다루기에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우리는 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심각한 질문들에 직면하게됐다. 만약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경수로 건설과 중유 공급을 중단하는 한편 다른 나라들에도 북한에 대한 제재에 동참하도록 요구할 경우, 또 북한이 이에 강력히 반발해 극단적인 행동으로 나설 경우, 결국 미국과 북한은 벼랑끝의 대결을 벌일 것으로 우려된다. 지금 한반도를 지배하는 화해의 분위기가 연기처럼 허망하게 사라지고 다시 전쟁의 공포까지도 배제할 수 없는 불안의 세월로 접어들게 될지 모른다.

북한이 왜 비밀리에 핵을 개발하고 이를 시인했는지 그 이유를 추측하는 것도 이제는 한가로운 것이 되어버렸다. 시급한 것은 북한이 먼저 현재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는 일이다. 북한으로서는 그들의 생존 보장과 핵을 맞교환하는 이른바 빅딜을 희망하고있을 것이지만 이제 미국이 전혀 흥정에 응할 의사를 갖고있지 않으며 북한의 협상 의지 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는 냉엄한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또 앞으로 있을 부시 행정부의 대북 제재에 맞서 극단적인 행동을 취할 경우 어떤 결과를 각오해야 할지 심각하게 계산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유일한 방법은 먼저 핵계획을 즉시 폐기, 핵무장 불량국가라고 하는 딱지를 모면함으로써 미국의 강력한 제재를 피하고 최근 어렵게 시작된 외부세계와의 화해과정이 지속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것 뿐일지 모른다. 북한의 현실적인 판단은 그 누구보다 그 자신들을 위해 긴요하다.

제네바합의가 파기될 경우 북-미간의 극한 대결은 필연적으로 남북, 북-일 대화의 추진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겨우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반도 평화 수립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도록 손을 묶고 기다릴 수는 없다. 우리 정부는 제네바합의 파기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면서 이 평화체제의 유지 가능성을 이야기하고있다. 이것이 단지 우리의 희망사항일 뿐 아니라 정확한 상황파악에 따른 예상이기를 바란다. 제네바 체제가 존속되도록, 또 그것이 어렵다면 어떤 식으로든 더 이상의 상황 악화를 막고 새로운 평화보장 체제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부시행정부도, 북한도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전쟁이 아닌 평화라고 하니 우리의 이같은 노력이 성공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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