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이 주도하는 미국사회에서 흑인은 오랫동안 소수자였다.

잘 알려진대로 온갖 형태의 차별은 그들의 일상을 무겁게 짓눌렀다.

긴 저항의 역사를 통과하면서 흑인들도 하나둘 바닥권을 벗어나고 있다.

물론 사회적 편견이 여전히 남아 있긴 하나 과거에 비해 지위가 높아지고 발언권이 세어진 것은 사실이다.

개리 시몬즈(38)는 미국의 주류 미술계에서 보기드문 흑인화가다.

골프스타 타이거 우즈처럼 시몬즈도 흑인들이 가까이하기 힘들었던 영역에 발을 내디뎌 최근 각광받고 있다.

그는 23일부터 11월23일까지 서울 청담동 카이스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어 자신의 미학을 소개한다.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에 참가해 두각을 나타낸 그가 한국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유령의 집' 주제의 개인전에는 근작 드로잉 20여점과 대형 회화 5점을 출품한다.

시몬즈의 그림은 에너지로 넘친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격렬하고 소용돌이처럼 흡인력이 강하다. 어지러움 때문에 알아차리기 쉽지 않으나 찬찬히 들여다보면 샹들리에, 새장, 난파선, 무도회장, 집 등의 이미지가 화면에 담겼다.

시몬즈는 약 10년 전에 칠판과 분필로 작업을 시작했다.

학교 교실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예술재료가 바로 칠판과 분필이었다. 그는 칠판에 형상을 그린 뒤 손가락으로 마구 지워냈다. 이는 흑인사회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부정적이고 차별적인 이미지를 없애려는 몸부림이기도 했다.

그의 작업은 낙서이자 고발이고 저항이자 혁명이다. 억눌리고 소외된 자가 벽에 낙서함으로써 마음을 표출하려 하듯이 그는 칠판과 분필을 사용해 미학적 발언을 시도했다.

작품 이미지는 차별의 울타리에 갇힌 흑인이나 우월감 속에 향락을 누리는 백인의 상황을 상징한다. 특히 나쁘게 덧칠되고 각인된 흑인 이미지에 대한 그의 반감은 크다. 할리우드 만화영화에서 까마귀가 악역으로 나오는 것도 모종의 음모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그는 본다.

시몬즈는 이런 차별 이미지를 공격적이다 싶을 정도로 강렬하게 지워내려 한다. 전시 제목을 `유령의 집'이라고 붙인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손가락으로 뭉개어 지운 화면이 유령처럼 흉측해서이기도 하지만 실제와 비실제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려는 게 더 큰 목적이다. 지워진 가운데서도 인위적 이미지는 여전히 흔적으로 남아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얘기다.

전시를 위해 서울에 온 그는 갤러리 벽면에 대형 회화작품을 그렸다. 벽면에 분필작업을 한 다음 손으로 지워 뭉갠 작업이다. 전시 후 사라지게 될 이 벽화는 비행기 꽁무니에서 뿜어져 나온 뒤 없어지는 연기를 떠올리고, 자취가 모호한 유령의 환영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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