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992년이란 찬란하고도 굴곡진 역사를 이끌어 온 신라 역대 왕 56명 가운데 유일하게 마지막 왕 경순왕의 능만이 경주지역을 벗어나 있다.
 
민통선 북방지역인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에 있는 경순왕릉은 오래도록 봉분이 없어지는 등 심하게 훼손됐던 것을 1748년(영조 24년) 봉축했으며 1975년 사적 제244호로 지정됐다.
 
봉분은 원형의 호석을 두른 높이 3m, 둘레 19.5m 크기이며 주변에 있는 표석·상석·팔각지붕형의 옥개를 얹은 장명 등을 비롯, 석양·망주석 등 석물(화강암)은 모두 조선 후기의 양식이다.
 
표석 전면에는 `신라경순왕지릉'이라 새겨져 있고 뒷면은 5행으로 경순왕의 간략한 생애를 기술한 87자의 음각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비각안에는 경순왕의 신도비로 추정되는 비가 있다.
 
이 비는 한국전쟁 전까지 고랑포리 마을 한복판에 방치되어 오던 것을 이후 원당리 고랑포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져 보호해 오다 1986년 비각을 새로 건립, 현재의 위치에서 보존돼 오고 있다.
 
대좌는 최근 화강암으로 다시 마련하였으며 비신(비문을 새긴 빗 돌)의 높이는132㎝, 너비 66㎝ 규모에 변성암 재질로 되어 있다.
 
비문은 심하게 마멸돼 전혀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비신 중간과 하단 일부분에서 10자 정도가 확인될 뿐이다.
 
경순왕은 신라 제 46대 문성왕의 후손으로 이름은 `부'이고 아버지는 신흥대왕으로 추이된 이찬 효정, 그리고 어머니는 계아태후다.
 
경순왕의 왕비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며 그녀와의 사이에 두 아들이 있는데 큰아들은 마의태자, 막내는 범공이다.
 
원래 경순왕은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으나 후백제 견훤이 경주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급습(927), 죽인 후 경애왕의 친척인 김부를 내세워 왕의 자리에 오르게 한다.
 
마지못해 왕에 오른 경순왕은 견훤보다 고려의 왕건을 우호적으로 대해오다 마의태자와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랑 김봉후에게 명을 내려 조서를 짓게한 뒤 고려 태조에게 보내 항복을 청한다.
 
이때 마의태자는 “나라가 존속하고 망함은 반드시 천명이 있을지니 다만 충신과 의사로 더불어 민심을 수습하여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다가 힘이 다한 후에 양도해도 되거늘 어찌 가히 천년의 오랜 사직을 가벼이 넘길 수 있느냐”며 통곡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순왕은 “형세가 이와 같이 위태로워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면 무고한 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을 당하게 함은 내 차마 견딜 수 없는 일”이라며 마의태자를 위로 했다.
 
마의태자는 그 길로 왕과 이별,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바위틈에 집을 짓고 마의를 걸친채 풀뿌리로 연명했으며 둘째 아들 범공은 화엄사로 들어가 중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고려 태조 왕건은 935년 11월, 항복하러 오는 경순왕 일행을 극진히 맞이한 후 나중에 자신의 장녀 낙랑공주를 경순왕에게 시집 보내 사위로 삼고 또한 경순왕은 답례로 자신의 조카딸을 왕건에게 보낸다.
 
978년 죽을때까지 고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은 경순왕은 백제의 의자왕과 고구려의 보장왕이 중국으로 끌려가 쓸쓸히 죽은 것과 비교하면 망국의 왕으로서는 행복한 편이었다는 것이다.
 
훗날 사람들은 경순왕의 사당을 지어 그의 혼을 떠받들었는데 이유는 고려 태조에게 항복한 것이 백성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자비심에서 우러나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경순왕의 넋을 기리기 위해 20여년전부터 신라 김씨 연합대종회는 매년 5월 첫째주 일요일 춘계대제, 김씨 중앙종친회는 음력 10월3일 추계대제를 올리고 있으며 지난 3일 추계대제때는 무려 2천여명에 가까운 후손이 현지를 방문, 눈길을 끌었다.
 
출입이 까다로운 민통선 북방지역에서 영면하고 있는 경순왕은 홀로 쓸쓸히 망국의 한을 달래고 있는 듯 보여 왕릉 앞을 지나는 이들의 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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