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 이름이 그냥 `야'라고 한다. 지난 90년대 말 미국 여자프로골프투어 시합장에서 취재차 만난 땅콩 김미현 선수의 대답이다. 이유를 묻자 스트레스 해소용이라 한다. 당시 미국 여자골프는 특파원들의 취재경쟁 대상이었다. 박세리 선수의 맹활약이 IMF 충격의 국민들에게 위안이 됐기 때문이다. 김 선수가 전과 달리 시합장에 강아지를 데리고 온 날, 서구선수들의 큰 덩치 속에 끼면 안스러울 정도의 작은 체형이라 강아지 껴안은 모습은 귀여움을 더해 앙증스럽기까지 한다. 연상 `야~', `야~' 부르며 볼을 맞대고 비비고 흔들고 이뻐 죽겠단다.


김미현 선수의 스트레스해소법

 
계절이 아마 지금쯤으로 미국 중서부의 더위는 찜통 속처럼 유난스럽다. 그 시절 김 선수는 미국 프로무대의 생초자(生初者) 신인이다. 라이벌 박세리는 씽씽 잘나가고 있다. 경제적으로 아직 어려운 처지라 골프장간의 이동수단은 중고 밴이다. 아빠가 늘 운전하고 엄마도 함께다. 미국 땅은 워낙 넓어 한 주(州)에서 다음 주의 시합장까지 이동하려면 하루 또는 이틀이 꼬박 비좁은 차안이다. 자연히 스트레스가 쌓일 수밖에 없고 때론 소리도 지르고 욕도 하고 싶어 그 해소법으로 친구겸 말상대겸 강아지를 택했다 한다. 감수성이 예민한 여린 처녀이고 또한 골프라는 게 유난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운동이니 쉽게 이해가 갔다.
 
지금 우리 주변은 여기저기서 부글부글 속 끓는 소리다. 너무 살기 어렵다는 서민들 불평이 보통 수준은 훨씬 넘는 듯 싶다. 불경기가 해도 너무 한다고 상인, 기업주들은 저마다 울상 일색이다. 김선일씨의 “살고 싶다”는 마지막 절규와 잔인한 피살소식에 접한 국민들은 저마다 열통과 분노로 가득 차 있다. 관계부처의 그간 사건처리를 놓고 높은 곳에서까지 열이 받친 모양이다. 보통국민, 그것도 단 한명의 문제인데 조각(組閣)이다, 국정감사다, 야단법석이다. 천도문제로 수도권의 기관장과 주민들 대부분이 생고민에 빠져들어 오락가락이다.
 
요즘 속터지는 건 사람만이 아니라 한다. 열 받친 토종 숫사슴의 와이담 조크가 그 하나다. 암사슴이 흰 새끼를 낳자 애비사슴이 땅을 치며 뭐라 했겠느냐 하는 거다. 답은 저게 언제 서양 흰둥이와 배가 맞았나 란다.
 
미물(微物)과 달리 우리는 그래도 스트레스 해소법을 잘 안다. 호젓이 산에 올라 김미현처럼 맘껏 소리쳐도 누가 뭐라 할 리 없다. 때론 술도 좋은 위로가 된다. 응당 안주감으로 세상 불평 불만이 진해지겠지만 예전처럼 말리고 이를 자도 없다.


선조들의 지혜를 배워야

 
이제 지루한 장마가 펼쳐질 판이다. 한여름 무더위의 시작도 바로 코앞이다. 이열치열(以熱治熱)의 옛말이 어울리는 철이다. 찜통속 복더위에도 뜨거운 음식을 들며 어른들이 즐겨 써 왔지만 실은 열은 열로 다스린다. 곧 힘은 힘으로 물리친다는 속뜻이 있다. (선조들의 건강비법엔 여름엔 바깥이 뜨거우니 몸속이 차가울 것이고 겨울엔 반대로 속이 더우니 기온차를 줄이기 위해 여름엔 펄펄 끓는 탕으로, 겨울엔 이가 시린 냉면의 음식요법으로 건강을 챙겼다는 한의학적 설명이 뒤따른다.) 선인들은 한여름의 찬 음식은 상하기 쉬워 피해야만 했을 거고 힘에는 힘의 논리가 잘 먹혀드는 시대를 살아왔다. 지금은 시대가 확 달라졌다. 냉장고 같은 문명의 이기가 너무도 흔해졌다. 문제해결엔 주먹보다 법이 앞서간다. 이성으로 감정을 누르고 다스려야만 편히 잘 살 수 있다. 따라서 이제 세상은 머리로 지혜로 헤쳐 나갈 수밖에 없다. 양보와 타협은 문제해결의 선행조건으로 등장하고 만다.
 
이 모두를 이열치열의 신 해법(解法)이라 부르고 싶다. 나보다 앞서 상대를 알고 배려해야만 가능해지는 방법이니 곧 역지사지(易地思之)이다. 쉬운 말로 입장 바꿔 생각해 봐 아닌가. 그건 가진 자, 힘 있는 자가 먼저 실천해야 할 몫이다.

이현규 객원논설위원(前 MBC 워싱턴 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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