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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호림 칼럼니스트
어느덧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로 가는 시간여행의 끝자락에 2018년도 와 있다. 개인, 기업, 정부도 이제 한 해를 마감하며 지나온 날들의 행적과 성과에 대해 차분히 평가하고 성찰해볼 시점이 됐다. 이런 때에는 인디언들의 지혜가 생각난다. 인디언들이 목적지를 향해 말을 타고 평원을 질주할 때, 가끔 멈춘 다음 달려온 길을 바라본다고 한다. 이는 혹 그들이 너무 빨리 달려왔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미처 따라오지 못한 것이 아닌지 확인해 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영혼이 도착했다고 생각하면 다시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고 한다. 이 나라 대한민국도 숨 가쁘게 달려온 한 해 동안의 길을 잠시 멈춰, 영혼이 함께 따라왔는지를 돌아 보았으면 좋겠다. 국가의 영혼이란 우리가 지향하는 건국역사와 이념, 국가체제, 정통성, 정체성의 헌법가치와 공동체가 공유하는 보편적 가치, 관습과 전통문화 등 국가공동체의 정신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과연 이런 이념과 가치들이 제 기능을 다해 순항해 왔는지? 불행히도 그러하지 못한 것 같다.

 무릇 이러한 정신의 문제는 먼저 역사 인식에서부터 비롯되고 확립된다. 역사를 조감하는 방법은 거대한 인류역사 관점에서 조망할 수 있고, 혹은 국제정세와 관계를 통해 볼 수 있으며, 아니면 가까이에서 내밀하게 들을 수 있다. 그러나 해방 전후의 역사인식과 해석은 역사학자의 이념과 정권의 성격에 따라 현저한 차이를 보여 논쟁의 대상이 돼 왔다. 이러한 역사관의 차이에 마침표를 찍으려는 듯, 올해 교육부의 새 역사교과서 집필 기준은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뺐을 뿐 아니라,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정부수립’으로 바꾸고, 그 대신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을 ‘대한민국 건국’으로 대체시키는 것을 포함해, 1948년 12월 12일 UN결의에 의해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받은 사실을 교과서에서 삭제하는 것을 고시했다. 이는 국가 근간에 관계되는 문제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의 기억을 없애려는 것이 아닐까? 역사란 지나간 일을 기록해 미래를 생각하기 위함이며,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기억의 공유’를 통해 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특정 이념에 매몰된 세력들이 역사를 부정하거나 왜곡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조지 오웰은 한 민족을 파괴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과거를 부정하고 뭉개버리는 것이며,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고 소설 「1984」에서 경고했다.

 다행이 오직 현재의 권력에 침묵하는 자가 다수인 이 시대에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과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 모임’은 내년 3월부터 시행되는 초·중등 교과서 개정 교육부 고시가 위헌임을 확인해 달라는 헌법소원을 헌법재판소에 지난달 14일 청구했다. 이들 ‘헌변’과 ‘한변’은 이 고시는 특정 역사관과 정치적 견해에 입각해 교육 행정권을 남용한 것으로 국민주권, 자유민주주의 원리를 핵심 원리로 하는 헌법규범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아 헌법상 법치주의에 위배되고 헌법 31조4항의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특정 역사관과 정치적 견해에 입각해’라는 지적은 당연하다. 그 이유는 모든 역사가는 예기치 않게 정치가가 될 수 있어 역사학이 핵물리학만큼 위험하다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인 에릭 홉스봄의 말과 같이 역사가들의 편견과 역사인식 한계를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권력자들의 ‘역사 바꾸기’시도는 오만이고 독선일 수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의 집’이라는 예루살렘의 야드 바셈(Yad Vashem) 박물관은 유태인 학살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곳이다. 그곳 출입구에는 뼈만 남은 물고기 형상 옆에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아라’라는 표어가 있고, 외부에는 ‘망각하려고 하는 것은 포로생활을 연장시킨다. 그러나 구원의 비밀은 기억이다’라는 경구가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지난 2천 년 동안 나라 없이 떠돌아다니며 수많은 핍박과 고난과 민족 멸절의 위기를 극복하고, 1948년 독립 국가를 건국한 것은 그들이 박해의 역사를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였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첫 부분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잊혀질 인간의 중요한 사건 흔적을 보존하기 위해’라고 저술 목적을 밝히고 있다. 국가정체성의 근간이 될 역사적 사실은 권력이나 이념에 의해 쉽게 폐기하거나 왜곡시킬 수 없다. 라틴어 히스토리아의 뜻에는 ‘진실된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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